대한기독교여자 절제회 - KWCTU

말씀설교

성찬(마태 26:26-30; 마가 14:22-26; 누가 22:17-20) 칼빈의 주석

절제회 | 2018.07.23 11:42 | 조회 2037

https://www.ccel.org/ccel/calvin/comment3/comm_vol33/htm/xxviii.htm
마태복음 26:26-30; 마가복음 14:22-26; 누가복음 22:17-20


시간을 내어서 읽으며 성찬을 바르게 이해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속죄제사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영생의 복을 다 누리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칼빈을 일으키셔서 천주교의 화체설이라는 미신을 대항하여 싸우게 하심으로 중세의 암흑을 깨뜨리시고 종교개혁을 완수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경으로,
진리의 빛가운데 하나님 백성이 믿고, 주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림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성장하도록 지난 500년간 축복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견고하게 서서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여야 하겠습니다.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마태복음 26: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칼빈은 이 말씀들로 유월절 만찬이 새롭고 더욱 뛰어난 만찬과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의 잔치는 이제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했다. 이것은 더욱더 명백하게 누가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누가복음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주셨다고 말할 때 그랬다. 칼빈은, 바로 이어서, 떡을 나눈 후, 주님께서 잔을 또한 더하셨음을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누가가 특별히 잔에 대하여 서술하는 것은, 떡도 포함했다고 칼빈은 생각한다. 

그들이 먹을 때,

그리스도께서 떡을 가지사 그들에게 새로운 저녁에 참여하라고 초대하신다.  감사를 드림은 신비를 생각하도록 준비하고 전환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저녁이 끝났을 때, 그들은 거룩한 떡과 잔을 맛보았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무관심으로부터 불러일으키시고, 그들 모두 지극히 높은 신비에 대하여 알도록 하셨다.  참으로 영적 생명의 이 분명한 증거는 옛 그림자와는 구별되어야 함을 그 사실의 본질이 요구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통상적인 풍습을 특별한 방법으로, 떡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시고 변경하심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의 마음을 다른 대상으로 이끄셨다. 모든 논쟁을 넘어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때 율법의 계산을 폐하시고, 새로운 성례를 세우셨다는 것이다.

축복하시고

마태와 마가는 축복하시고 를 희랍어 유로게사스 (εὐλογήσας)로 표현하며, 누가는 감사를 드리시고 를 희랍어  유하리스태사스 (εὐχαριστήσας)로 표현하는데, 뜻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그들이 그 잔에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고 할 때, 그들은 그 전의 단어를 충분히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치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내쫓는 의식을 행하시기나 한 것처럼, 십자가 사인으로 그 감사를 표현하는 교황주의자들의 무식함은 더욱 터무니 없다. 이 감사드림이 영적 신비와 연결되어 있다고 칼빈이 파악한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도록 명령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들의 사라져 가는 삶을 지탱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보통 먹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의 관점을 거룩한 행위로 이끄시는데, 이는 인류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도록 하기 위하심이다. 만약 배에 들어가는 음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찬양하게 설득하고 각성시킨다면, 하물며, 그가 우리 혼을 영적으로 먹이실 때, 이 경건한 행동은,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를 감격하게 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할 것인가?

받아서 먹으라.

칼빈은 지루하지 않도록 간단하게 주께서 세우신 제도의 성격이 무엇인지, 그것이 내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복음서 기자들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에 대하여 설명한다.  먼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함께 서로 교제하며 참여할 만찬을 제도화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동료들과 자신을 구별하여, 그리스도의 만찬을 따로 먹는 것은 마귀가 고안해 낸 것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떡을 모두 나눈 후 개인이 혼자서 그것을 삼켜 버린다는 사실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비록 교황주의자들이 그들의 미사 속에 주의 성찬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자랑하나, 그 경우의 성격으로부터 명백한 것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미사를 집전할 때, 그 미사들은 마귀에 의해 주의 성찬을 묻어 버릴 수많은 전리품들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성찬을 통해서 우리에게 추천하는 희생의 종류는 무엇인지 같은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주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받아서라고 명하신다. 그러므로 주님 자신만이 떡을 제공하는 분이심을 나타내신다. 교황주의자가 고안해 낸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찬에서 제공하시는 것을 주님과 전혀 상관없는, 오히려 주님을 적대하는 작자들로부터 나오게 한 것이다.  그것은 실로 이상한 순서의 도치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몸을 받으라고 명령을 받는 자가, 그것을 제공하는 지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스스로 임명한 사제가, 하나님께 그의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려고 하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얼마나 많은 신성모독이 그들의 거짓된 제사에 넘쳐나는지 묻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세운 제도로부터 너무 멀어져, 그것에 정반대로 가는 교황주의자들의 행태를 보여주면서, 칼빈은 그 그릇된 제도를 부인한다. 

이는 내 몸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으로, 떡이 거룩하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육신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거룩하게 되어서라는 단어의 의미가 바르게 합당한 의미로 이해 된다면 문제가 없다고 칼빈은 본다.  그래서, 떡은 몸의 영양분을 위해서 준비된 것이었는데, 그리스도께서 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심으로 다른 용도, 곧 영적 양식으로서 쓰이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는 새롭게 태어남과 같다고 초대 교회 선생들은 말했다.  그러나 떡이 속삭임이나 숨을 불어 넣어서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명백한 가르침에 의해서 된 것임을 또한 확고하게 주장해야 한다. 이는 떡이 그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으로 주심으로서 거룩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거룩하게 하심은 엄숙한 증거인데, 주님께서 땅의 썩어질 표지를 영적 용도로 사용하시고자 우리에게 지정해 주신 것일 뿐이다.  그것은 믿음을 세우기 위해서 분명히 그의 명령과 약속이 선포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  그로부터 또한 확실한 것은 교황주의자들이 낮은 소리로 속삭이며 숨을 불어 넣는 것은 그 신비에 대한 신성모독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것이 그의 몸이라고 선포하실 때, 주께서 떡을 거룩하게 하시어, 만약 그 물질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단지, 그것이 새로운 목적에 적용된다는 것을 믿어야 할 뿐이다. 카톨릭의 화체설이라는 괴물이 일단 소개 되자, 세상은 마귀의 교묘함에 넘어가서, 세계가 오랫동안 얼마나 속임을 당해오고 있는지 모른다. 그 결과 이제 이 말씀들에 대한 어떤 진실한 해석의 빛도 받아 들이기 힘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 그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칼빈은 우리가 성례를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고자 최후의 만찬 주석에 힘을 쏟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떡이 그의 몸이라고 선포하실 때, 이 말씀은 성례에 대한 말씀이다.  이는 성례가 보이는 표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그것이 의미하는 것과 그것의 실체가 되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다른 한 편, 그 의미하는 것의 이름은 그 표지로 이전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도 성경과 충분히 친숙한 사람은 성례의 형태를 가진 표현은 환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환유법은 성경에서 자주 나타나는 수사법으로, 칼빈은 몇 가지 예를 든다. 외적인 표지를 그것이 나타내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환유법이다.  예를 들어서, 세례를 중생의 씻음 (디도서 3:5)이라고 한다든지, 또 족장들에게 광야에서 물이 흘러나오게 한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고린도전서 10:4), 비둘기를 성령으로 부를 때 (요한복음 1:32), 어느 누구도 그 표지가 그 사물의 이름을 얻음은 그들이 대표하는 성격 때문임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높이는 것을 기뻐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만찬의 모든 성례에 공통적인 것을 적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들은 분명하고 문자적인 의미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왜 같은 법칙이 성례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것인가? 분명히, 만약 그들이 반석이 실제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쏘아대는 비방은 거짓될 뿐이다.  만약 우리가 떡은 그의 몸이라고 불리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면 그들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이 뒤집어졌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언어의 원칙은 우리가 최근에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어거스틴에 의해서 옛 사람들의 권위 위에 전수된 것으로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곧 영적인 것들의 이름들이 부적당하게 표지들에 붙여져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그 속에 성례가 언급될 때, 이 같은 방법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원칙을 제시할 때, 그것이 마치 새롭고 이상한 것처럼, 큰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무슨 목적인가? 완고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소리치게 내 버려 두라. 그러나 모든 건전한 판단과 겸손의 미덕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 말씀들 속에는 표현의 성례적 형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이기 때문에 떡은 그의 몸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당연히 추론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황주의자들은 그들의 화체설을 가지고 속이며, 그것은 실체가 없는 외형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떡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어리석은 환상은 다음 말씀 같이 바울이 주장함으로 부인된다.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고린도전서 10:16).
그 밖에도, 그들의 개념은 성례의 그 본질 자체와도 달라서, 만약 거기에 진실한 외형적 상징이 없다면, 성례에 필수적인 모든 것도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 눈 앞에 있는 것이 떡이 아니라면, 그래서 공허한 형태뿐이라면,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육신을 먹는다고 배우겠는가? 그 밖에도, 그들은 다른 상징에 대하여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은 나의 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 잔은 새 언약을 위한 나의 피라고 하신다.  그들의 관점에 의하면, 그러므로 포도주뿐만 아니라, 그 잔도 그 물질들에 포함되어, 피로 화체해야 한다.  다시, 나는 포도나무의 이 과실을 앞으로 마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태에 의해 기록된 말씀들은 그가 제자들에게 마시라고 전해 준 것은 포도주라고 명백히 나온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교황주의자들의 무지함이 충분히 노출되었다.
여기까지 칼빈은 우리 주님의 성찬에 대한 간단한 해석을 지적했다. 우리에게 제공된 것은 공허하고 뜻 없는 표지가 아니고, 이 약속을 믿음으로 받는 자들은 실제로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고 칼빈은 바르게 주장한다.  이는 주님께서 그것이 그의 몸이라고 선포하시면서, 만약 그 효과가 그 형상에 진정으로 담겨 있지 않았다면, 그의 백성에게 떡을 먹으라고 헛되이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님의 만찬에서 우리가 즐기라고 주신 것이 실제인가 혹은 표지에 지나지 않는가 우리가 이 점을 반박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록 우리는 그 속에서 떡 외에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지만, 주께서 그의 살로 우리 혼에 영양을 공급하실 때, 주께서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거나 우리를 조롱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살을 진실하게 먹는 것은 표지로 주목된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실제로 나타나는 것이다.
세 가지 실수들에 대해서 우리는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첫째, 영적인 축복을 표지와 혼돈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를 땅에서 찾거나 혹은 땅에 속한 성분 속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성령의 비밀한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삶 속으로 우리를 끌어가는, 믿음으로서만 얻게 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먹는 것도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뒤집어 엎어 버리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표지와 그것이 의미하는 것 사이에 구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성례로부터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적은 능력의 분량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우리를 땅의 성분을 묵상하는 것으로부터 하늘의 비밀로 이끌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몸과 떡을, 그리고 그 피와 포도주를 구별하려고 하지 않는 자는, 주님의 만찬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나 혹은 어떤 목적으로 믿는 자들이 이 상징들을 사용하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는 합당한 방법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땅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주께서 거하시는 하늘의 영광을 향하여 위로 솟아 올라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썩지 않을 생명으로 옷을 입었을 때에도, 그 자신의 본질을 옆으로 두지 않음으로, 유한하였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하늘 위에 올라가셔서, 어떤 역겨운 상상도 우리를 땅의 것으로 사로 잡지 못하게 하신다.  확실하게, 이 신비가 하늘에 속한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땅으로 끌어 내리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것은 없을 것임으로, 그와 반대로 그는 우리를 높은 것, 그 자신에게로 부르실 것이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마지막 요점은, 먹는다는 것의 종류이다.  우리는 그의 실체가 자연적 방법으로, 우리 혼 속으로 들어온다고 꿈꾸면 절대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살을 먹으며, 그것에 의해서 생명을 받는다. 우리는 떡과 살 사이의 유사점과 닮은 점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 혼이 그리스도 자신의 살을 먹는 것이, 떡이 우리 몸에 힘을 주는 것과, 똑 같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살은, 그러므로, 영적 자양분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은 생명을 준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그 안에 거하는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행동이 그를 믿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믿음 외에는 다른 어떤 길도, 그리스도를 먹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는 그것을 먹는 것 자체가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문장은 마태와 마가에 의하면 거룩한 만찬 바로 직후에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잔에 든 그의 피의 상징을 주셨을 때이다. 그것으로부터, 어떤 사람은 누가가 여기 서술하는 것은 같은 것으로, 우리는 그가 짧게 후에 반복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쉽게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언제 어떤 시점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지는 그 자체 안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서기자가 그것을 통해서 말하려는 모든 것은 제자들이 다가오는 그들의 주님의 죽으심과 새로운 하늘의 생명에 대하여 경고받게 하려 하심이다. 이는 그의 죽으심이 가까워 올수록, 그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지 않게, 그들이 더욱 견고해져야 할 필요성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주께서 그의 죽으심을 성만찬에서 그들의 눈 앞에 다시 보여주려 하셨으니 거울에서와 같이, 그가 이제 세상을 떠날 것을 다시 선포한 것은 이유가 없지 않은 것이었다.
이 지식은 슬픔을 가득하게 하여서, 그들이 그의 죽으심에 대한 생각으로 움츠리지 않도록, 더 낳은 생명이 따라 올 것이라는 위로가 바로 덧붙여져야 했다.  마치 그가 “사실은 내가 정말로 죽음으로 달려 가고 있다. 이는 그것을 통해서 축복된 영생으로 나아가기 위함이요, 하나님 나라에서 너희 없이 혼자 살지 않으려 함이니, 같은 생명으로 너희가 나와 함께 교제하도록 하려 함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의 손을 잡고 십자가로 이끄시며, 거기로부터 그들을 부활의 소망으로 일으키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 그 사다리를 통해서만, 그들은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천국으로 영접받으신 후, 우리는 마땅히 십자가를 통해서 천국에 이르는 묵상으로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이는 죽음과 부활의 생명은 서로 일치하는 것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들을 통해서, 주께서는 그들과 주께서 친히 나누실 영광을 그들에게 약속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 나라에는 고기와 마시는 것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어떤 이들이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찮은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임재가 이제 곧 없어지고, 주께서 그들과 함께 잡숫지 않으실 것은, 그들이 천국의 생명을 함께 즐길 그 때까지임을 뜻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 생명 안에서 교제하면, 고기와 음료의 도움이 필요 없는 것을 주께서 지적하시면서, 거기에는 새로운 종류의 음료가 있을 것을 말씀하신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주께서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계심을 배운다.  따라서, 누가는 단순히, 하나님의 나라가 오실 때까지라고 말한다.  간단히 줄이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구속의 열매와 효과는 그가 그의 죽으심으로 얻은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어떤 자들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 후에 제자들과 잡수실 때, 이 말씀들은 다 이루어졌다는 의견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그의 뜻과 다르다.  이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생명과 천국의 생명 사이에 중간지점으로, 하나님 나라는 아직 충분히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만지지 말라.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아직 올라가지 않았음이라 (요한복음 20:17)

그 밖에도, 그리스도와 새 포도주를 마시는 그 같은 영광의 동참자가 되기 위해서 들어가야 할 하나님 나라에, 제자들은 아직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그가 그의 제자들과 하나님의 나라에 모일 때까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선포하셨지만,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 후에 제자들과 마셨다는 것을 우리가 읽을 때, 눈에 보이는 모순점은 쉽게 제거된다. 이는 고기와 음료에 대한 것을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삶의 교제에 대하여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셨을 때는, 음식으로 그의 몸을 보강하려는 목적이나, 혹 그의 제자들과 교제를 가지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그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그들이 아직도 의심하고 있었음이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고양시키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그러므로 자연적인 뜻으로 만족하자. 곧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제까지 땅에서 죽을 인간으로 살아 왔는데, 앞으로 그들을 복되고 영원한 생명 안에서 그와 교제하는 영원불멸하는 자들로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22:19.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다른 두 복음서 기자는 이 구문을 빼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 없는 구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에게 떡이 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구원이 우리를 위해 주어진 까닭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살은, 믿음으로 먹는 자들 외에는 아무 득이 없다. 한편, 드려진 제사에 대한 언급이 있지 않으면, 그것을 먹는 것이 뜻이 없어 전혀 가치가 없게 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살이 그에게 자양분이 되기를 바라면, 그는 그것이 십자가에서 드려진 것이며,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위해서 지불한 값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  마태와 마가가 떡의 상징에 대한 언급에서, 빼 놓은 그것을, 그들이 잔을 말할 때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구절은 두 가지, 곧 떡과 포도주에 다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을 바르게 먹으려면, 우리는 그것이 의미하는 희생을 묵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도록,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6:27.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그리스도의 계획은 우리의 믿음을 그 자신에게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떠나서 아무것도 찾지 않도록 하려 함이다.  그는 두 가지 상징으로 우리의 생명은 그 안에 감추어져 있음을 보이려 하셨다. 이 몸은 고기와 음료로 양분을 공급받을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만이 홀로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제공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씀하시기를, 그는 고기와 음료를 대체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에 의해서 그는 그의 놀라운 낮아지심을 보이신다. 그렇게 자신을 연약한 우리의 육신의 한계까지 낮추시는 것을 허락하심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시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황의 무례함과 신성모독이 더욱 가증스럽다.  이는 그가 이 거룩한 연결을 끊은 것을 조금도 양심에 가책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두 가지 상징, 곧 떡과 포도주를 함께 사용하셔서, 그가 모든 그의 추종자들에게 선물하시는 생명의 풍성함을 증명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배운다.  하나님께서 함께 연합하게 하신 이 두 가지를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분리할 수 있는 권리가 어디 있는가? 우리 주님께서 모두 잔을 마시라고 하신 분명한 이유가 바로 이런 신성모독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심인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떡에 대하여서는, 그가 단순히 받아서 먹어라고 하셨다고 우리는 읽는다.
악한 새로운 고안을 대항하여 믿는 자들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모두 마시라고 밝히 명령하셨고, 왜 마가는 분명히 말하기를, 그들은 모두 그것을 마셨다고 말하였는가? 그러나 이 엄격한 금지도 교황이 주님께서 세우신 법을 바꾸고 범하는 것을 지체하게 하지 못했다. 이는 교황이 임의로 모든 사람으로부터 잔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교황의 진노는, 그 편에서 이유를 가진다고 증명하기 위하여, 주장한다. 곧 두 가지 중 하나면 충분하다고…. 그 이유는 살은 피를 공존하는 형태로 포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와 같은 핑계로 그들은 성례 전체를 한 옆으로 마음대로 치우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외부적 도움이 없이 자신과 함께 할 사람들로 우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유치한 트집들은 그들의 경건하지 못함을 전혀 뒷받침하지 않는다. 믿는 자들이 스스로 주께서 주신 도움을 떠나서, 혹은 그들 스스로 그들에게 주신 도움들을 내 버리도록 허락하여야 한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신비를 이렇게 악하게 혼잡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마가복음 14:24. 이것은 내 피다. 

칼빈은 이미 언급했다.  죄의 용서를 위해서, 피가 흘려져야 한다는 마태의 서술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희생제사로 이끄는데, 이것을 기억함이 없이는 주님의 성찬은 결코 합당하게 지켜질 수 없다. 그리고, 참으로, 믿는 영혼들이 만족함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화목하게 되셨다고 확신을 얻는 길은, 그 외에 다른 길은 있을 수가 없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많은 이라는 단어로 그가 뜻하는 것은 세상의 한 부분만을 뜻하지 않고, 온 인류를 말한다.  이는 그가 많은 을 하나와 대조하여, 그가 한 사람만의 구속주가 될 수 없고, 저주의 정죄로부터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주목할 것은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누가에 의해 서술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각 믿는 자들이 그의 유익을 위하여 피 흘리심을 적용하도록 권면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에 나갈 때, 우리로 하여금 일반적으로 세상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할 뿐 아니라, 각자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새 언약의.

누가와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5) 그것을 다르게 표현한다. 내 피로 세운 새 언약 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뜻은 같다.  이는 영적으로 피를 마시는 것에 의해서 이 언약은 비준되고,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그것으로부터 추론하게 되는 것은 교황주의자들과 그와 같은 낙인이 찍힌 다른 자들이 그 말씀들에 경직되어 붙잡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게 우상을 섬기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모든 고함치는 것과 함께, 성령의 해설을 그들은 옆으로 치워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곧 그 잔이 피로 불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마땅히 그리스도의 단순한 말씀들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논박하면서 우리의 귀를 외부로부터 오는 해석들에 대하여 닫으라고 말할 권리를 이제 가지고 있지 않다. 이는 말씀하시는 분이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확실하게 그들은 그가 그 자신의 말씀을 해석하시는 자격이 있으심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공개적으로 선포하시기를, 그는 그의 몸을 떡이라고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우리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단번에 드리신 제사로, 우리는 이제 영적으로 잘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점이 우리의 주목을 받을 필요가 있다.  유언 혹은 언약 (διαθήκη, 디아테케, 누가복음 22:20)이라는 단어로 우리는 거룩한 만찬에는 약속이 포함된다는 것을 추론한다.  이것은 믿음이 성례에 의하여 도움이나 공급, 후원과 성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오류를 논박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과 사람들의 믿음 사이에는 항상 상호간에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새롭다는 별칭으로 그가 나타내기를 의도하는 것은 옛 제도는 이제 그쳤고, 견고하고 영원한 언약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신비와 율법의 그림자 사이에 간접적인 대조가 있다. 이로부터 확실한 것은 우리 조상들보다 우리의 형편이 얼마나 나은가 하는 것이다.  이는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그 제사 결과로, 우리는 진실을 온전히 소유하게 된 것이다. 

마가복음 14: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세 복음기자는 요한이 집에서와 거리에서 주님께서 전하신 것을 서술한 신령한 대화들을 빼 놓았다. 이는 그들의 목적은 그의 가르치심보다 우리 주님의 행동의 역사를 포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유다가 올 곳으로 가셨다는 사실만을 그들은 주목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그가 그의 때에 그를 배반한 자를 자발적으로 만나러 그러한 상황을 만드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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