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법에 있는 수정안 제 18항 금주법은 프란시스 윌라드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 밖에도, 윌라드는 여성의 투표권, 공립 유치원, 여성들을 위한 별도의 감방제도, 신교의 일치, 이 모든 미국 생활의 구조에 영구적인 공헌을 했다. 미국 사람들이 알코올 과용 문제와 오랜 씨름을 했을 때, 윌라드는 이 문제에 도전했다. 1890년 절제회는 150,000명의 회비를 내는 회원들을 가짐으로, 미국 역사상, 그리고 세계 처음으로 가장 큰 여성운동이 되었다. 절제운동을 19세기 개혁운동가들이 사회변혁의 구심점으로 보았고, 그들은 음주가 가장 큰 적임을 알았다.
절제회는 교회일 같이 여성들이 하기에 알맞은 일이요, 여성들이 항상 받아들여지는 분야로 생각되어졌다. 투표권과 여성 권리, 감방제도 개선 등 절제운동은 수많은 문제를 제기하며, 윌라드는 1890년에 가서 많은 여성들이 공적인 일에 종사하도록 만들었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 금주는 도덕법이요, 개인권리의 침해로 보았으나,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개인적인 습관에 대한 새 입법규제는 비단 알코올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흡연도 규제의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19세기 절제운동은 개혁전통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윌라드는 자주 그의 강력한 희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글로 발표했다. “사회와 국가라는, 말하자면 더 큰 가정 속에서 여성들의 권력은 우주적인 평화와 순결, 동포애에 입각한 통치를 이룩하는 것을 돕는데 가장 덕이 되도록 사용될 것이다.”(1894년 “회장연설문”에서)
윌라드는 뉴욕 주 로체스터 옆 작은 마을, 쳐지빌에서 1839년 9월에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단란하였고, 윌라드의 아버지, 요시아는 신앙에 신실하며, 사업관계에서 존경을 받고 정확했다. 그의 어머니, 메리 윌라드는 지성적이면서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부인으로, 딸의 일생 친구가 되었다. 윌라드의 부모와 어린시절 관계는 그의 공적인 활동에 효과적으로 공헌하였다. 1857년부터 1860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윌라드가 17세에서 20세에 이르기까지, 윌라드는 정규교육을 받았다.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윌라드는 신앙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1860년 1월, 윌라드는 정식으로 감리교회에 연합하고, 진심으로 새 삶을 살면서 다시는 방황하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20세 때,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중년에 공식적으로 표현했던 교회일치를 위한 자유로운 정신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1870년, 세 가지 요소가 프란시스 윌라드를 교육가가 되도록 인도했다. 첫째, 여성에 대한 질문에 헌신한 것, 둘째, 그의 훈련과 체험이 학문생활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 점, 셋째, 충분한 전망을 가진 직장에서 그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71년 2월 14일, 노스웨스턴대학부속여자대학 이사회는 프란시스 윌라드를 새 대학총장으로 지명했다.
시카고신문은 이것을 환영하며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 우리는 여성이 권위 있는 명칭, ‘총장’으로 존귀함을 받는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믿는다. 그러나 윌라드는 그의 존귀에 상응하는 능력과 정직함으로 잘 수행해 나갈 것이다.”
1874년 여름, 윌라드는 그의 삶을 새롭게 설계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교회와 거리, 국가의 입법부의 청사에는 전투적이며 힘에 넘치는 여성들의 절제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윌라드는 이 여성들이 택한 길을 걷기로 선택했고, 마침내 그들의 방향을 지도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수백 개의 마을과 도시 길거리에 나와서, 술집 주인들이 술을 더 못 팔게 설득하며, 술집 고객들까지도 금주선언을 하게 만들었다. 짐작컨대, 윌라드의 오빠 올리버의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문제가 절제운동에 더 관심을 가지게 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