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윌라드

1839년 9월 뉴욕, 처치빌 출생
1871년 2월 14일 노스웨스턴여자대학 학장으로 임명됨
1876~1877년 시카고 연합회 회장 역임
1883년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창설
1888년 미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으로 선출
1888년 세계여성단체협의회 창설
1891년 11월 제 1 차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제 2 대 회장으로 선출
1898년 2월 17일 소천

절제운동 창설자 Francis E. Willard 여사 생애 - Ruth Bordin

Francis E. Willard의 어린시절
미국 국법에 있는 수정안 제 18항 금주법은 프란시스 윌라드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 밖에도, 윌라드는 여성의 투표권, 공립 유치원, 여성들을 위한 별도의 감방제도, 신교의 일치, 이 모든 미국 생활의 구조에 영구적인 공헌을 했다. 미국 사람들이 알코올 과용 문제와 오랜 씨름을 했을 때, 윌라드는 이 문제에 도전했다. 1890년 절제회는 150,000명의 회비를 내는 회원들을 가짐으로, 미국 역사상, 그리고 세계 처음으로 가장 큰 여성운동이 되었다. 절제운동을 19세기 개혁운동가들이 사회변혁의 구심점으로 보았고, 그들은 음주가 가장 큰 적임을 알았다.
절제회는 교회일 같이 여성들이 하기에 알맞은 일이요, 여성들이 항상 받아들여지는 분야로 생각되어졌다. 투표권과 여성 권리, 감방제도 개선 등 절제운동은 수많은 문제를 제기하며, 윌라드는 1890년에 가서 많은 여성들이 공적인 일에 종사하도록 만들었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 금주는 도덕법이요, 개인권리의 침해로 보았으나,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개인적인 습관에 대한 새 입법규제는 비단 알코올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흡연도 규제의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19세기 절제운동은 개혁전통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윌라드는 자주 그의 강력한 희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글로 발표했다. “사회와 국가라는, 말하자면 더 큰 가정 속에서 여성들의 권력은 우주적인 평화와 순결, 동포애에 입각한 통치를 이룩하는 것을 돕는데 가장 덕이 되도록 사용될 것이다.”(1894년 “회장연설문”에서)

윌라드는 뉴욕 주 로체스터 옆 작은 마을, 쳐지빌에서 1839년 9월에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단란하였고, 윌라드의 아버지, 요시아는 신앙에 신실하며, 사업관계에서 존경을 받고 정확했다. 그의 어머니, 메리 윌라드는 지성적이면서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부인으로, 딸의 일생 친구가 되었다. 윌라드의 부모와 어린시절 관계는 그의 공적인 활동에 효과적으로 공헌하였다. 1857년부터 1860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윌라드가 17세에서 20세에 이르기까지, 윌라드는 정규교육을 받았다.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윌라드는 신앙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1860년 1월, 윌라드는 정식으로 감리교회에 연합하고, 진심으로 새 삶을 살면서 다시는 방황하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20세 때,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중년에 공식적으로 표현했던 교회일치를 위한 자유로운 정신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1870년, 세 가지 요소가 프란시스 윌라드를 교육가가 되도록 인도했다. 첫째, 여성에 대한 질문에 헌신한 것, 둘째, 그의 훈련과 체험이 학문생활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 점, 셋째, 충분한 전망을 가진 직장에서 그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71년 2월 14일, 노스웨스턴대학부속여자대학 이사회는 프란시스 윌라드를 새 대학총장으로 지명했다.
시카고신문은 이것을 환영하며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 우리는 여성이 권위 있는 명칭, ‘총장’으로 존귀함을 받는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믿는다. 그러나 윌라드는 그의 존귀에 상응하는 능력과 정직함으로 잘 수행해 나갈 것이다.”

1874년 여름, 윌라드는 그의 삶을 새롭게 설계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교회와 거리, 국가의 입법부의 청사에는 전투적이며 힘에 넘치는 여성들의 절제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윌라드는 이 여성들이 택한 길을 걷기로 선택했고, 마침내 그들의 방향을 지도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수백 개의 마을과 도시 길거리에 나와서, 술집 주인들이 술을 더 못 팔게 설득하며, 술집 고객들까지도 금주선언을 하게 만들었다. 짐작컨대, 윌라드의 오빠 올리버의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문제가 절제운동에 더 관심을 가지게 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절제운동에 헌신
윌라드는 그의 선택의 중요성을 밝히 알았다. 가정을 위협하고 문명을 파괴하는 모든 악을 대항하는 첫 기구로서, 올바른 방향만 제시해주면, 절제회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을 하게 될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또한 절제회가 여성들을 교육하는 큰 도구가 될 것을 보았다. 결과적으로, 윌라드는 그 자신과 그가 이끌게 된 기구를 위해서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
가장 중요한 첫해, 윌라드는 통신서기로서 전국기독교여자절제회를 잘 붙들어 주었다. 그의 조직적 노력은, 주로 절제회에 관심을 보인 개인이나 단체에게 수많은 편지를 쓰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통해서 첫해에 16주에 80명 이었던 대표단이 21주에는 200명으로 증가되었고, 회비를 내는 회원이 7,500명으로 늘어났다.

무디는 윌라드의 은사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가 시카고에서 보스턴으로 떠나기 전에 그의 전도단에 가입할 것을 요청했다. 보스턴에서 부흥회를 할 동안 윌라드는 안나 고든을 만났다. 보스턴 은행가의 딸이었던 안나 고든은 재능 있는 음악가로 그의 아버지는 미국 해외선교회의 회계였다. 마운트홀리요크대학을 나와 스물세 살에,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무디 부흥회에 헌신하였다. 윌라드를 만난 후, 그는 남은 삶 22년간 프란시스 윌라드의 삶과 연결되어 절제회를 위해 일했다.

고든 자신도 막강한 연사요 조직가로 성장하였고, 특별히 젊은이들과 일하는데 힘을 쏟았다. 고든은 복음주의자였고 절제운동가였다. 그의 헌신적인 봉사는 윌라드가 더 큰 사회문제에 도전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다. 윌라드와 고든은 평생 함께 공통된 공적, 사적 목표를 향해 일했다. 윌라드 사후에 안나 고든은 윌라드의 뒤를 이어 절제회 회장이 된 릴리안 스티븐스에게 1914년 그가 죽을 때까지 충성되게 봉사했다. 그리고 1925년까지 스티븐스를 이어 절제회 회장으로 봉직했다. 절제운동의 희망이었던 제 18조항(금주법)이 국회에서 마침내 통과하는 것을 목도한 것은 바로 안나 고든이었다.

프란시스 윌라드는 여성참정권운동에 대해 그가 부르심 받은 것을 아래와 같이 피력한다.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절제강연을 준비하던 중, 1876년 봄, 주일 아침 성경공부와 기도를 위해서 집에 있을 때였다.
“내가 머물고 있던 집의 노련한 십자군이던 안주인 방에서 내가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내 마음에 내가 믿기로, 위로부터 선포하시는 말씀이 들렸다. ‘너는 술의 횡포에서 가정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성이 투표권을 가져야 함을 외쳐라.’ 그리고 나서, 내 일생 처음이자 유일하게, 내 뇌리에 논쟁과 실례의 완벽한 문장이 번개와 같이 떠올랐다.
나는 이 내용을 그대로 간직하였다가 몇 달 후, 필라델피아 세인트죠지의 회당에서 공식적으로 여성참정권에 대한 나의 신념을 표명하였다 (50년을 회고하며 : 한 미국 여성의 자서전, 시카고 : 여자기독교절제회출판사, 1889, p. 351.).

절제회의 위대한 힘의 하나는 전국 절제회와 각주 절제회, 그리고 지방절제회 안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다양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1885년에 다섯 주에서 여성에게도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북부에서는 여성투표권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892년에 이르러서는 미국절제회의 공식간행물이었던 “절제회 회지(Union Signal)”는 여성들이 남성의 투표권을 거절할 수 없듯이 남성들도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을 권리가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시했다. 1880년에 보스턴에서 절제대회가 열렸을 때, 그는 회장으로서의 첫 연설에서, 절제운동은 점차적으로 여성들에게 그들이 반드시 투표권을 가져야 함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 대회는 승리의 순간이었다. 여성참정권은 여성다움과 절제의 베일에 싸여, 수많은 미국 여성들 대부분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프란시스 윌라드가 똑똑하게 표현해 주었던 것이다.
미국 여성운동 지도
1880년대, 프란시스 윌라드는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여성이 되었으며, 개신교에서 평신도대변인으로서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80년대 절제회는 20만 명의 회원으로 늘어났고, 윌라드는 이와 같은 확장에 가장 큰 공로자였다.

1885년, 절제회는 그 본부를 뉴욕에서 시카고로 이전하여 절제회 사무실과 주된 출판사인 “절제회 신호기”가 한 지붕 아래 나란히 있게 되었다. 윌라드는 평생 열심히 일했다. 1880년대 윌라드가 미국 대중의 의견에 영향을 주는데 사용한 주된 매체는 절제회의 전국대회에 그가 했던 연설이었다.

프란시스 윌라드는 그가 기독교여자절제회를 위해서 발명한 간결한 표어, “모든 것을 다 하라.”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그는 절제운동을 통한 개혁을, 해결해야 할 많은 사회적 문제들의 한 부분으로 다루었다. 절제회와 함께 윌라드는 감옥구조개혁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여성단체들은 여자죄수들과 미결수들에 대한 사역에 특별한 관심을 빠르게 발전시켰다. 1883년, 절제회는 그 활동 계획표에 “사회악 개혁”이라는 제목으로, 매춘에 있어서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동등한 혐의를 인정할 것을 강조하며 공창을 없애고자 노력했다. 그는 또한 강간과 같은 남자의 성적범죄를 반드시 처벌해야 함을 강조했다. 윌라드는 또한 미국의 노동역사에 있어 중요한 시점에서, 절제회 여성들과 노동운동을 연계시켰다. 그는 70년대 중반에 그가 도심지 중앙에서 경험했던 것을 잊지 않았고, 나아가서 1880년대를 특징지었던 실업과 경제침체, 그리고 노동쟁의에 의해 더 급진적으로 되었다.

윌라드의 절제운동 사상에서 핵심을 찌르는 것은 바로 예방의 효율성에 대한 신념이었다. 윌라드는 절제운동과 자신을 연합하여, 그의 사회철학의 주된 강령으로 예방적인 차원에서의 개혁을 옹호했다. 절제운동은 모든 부분에서 술의 폐해를 막음으로 범죄와 가난, 어린이와 부인 학대, 그리고 가정파괴를 예방하려고 구성된 운동이었다. 윌라드와 다른 절제회원들은 여성단체협의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담당했고, 윌라드는 미국과 세계여성단체협의회를 영구적으로 조직한 위원회의 회장을 맡아 1888년 회의 결과 미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란시스 윌라드는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충성되고 헌신적인 감독제도 감리교 교회의 일원이었다. 그의 감리교회를 향한 사랑은 깊고 진지한 것이었다. 그는 경험 있는 전도자였다. 1876년, 그는 드와이트 무디의 조력자로 그의 중요한 전도자 중 한 사람이었고, 1888년까지도 그는 자기가 안수 받은 목사가 되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개신교 종교지도자들과 교회를 치리하는 기구의 여성들을 비하하는 태도는, 윌라드로 하여금 개신교 교회 내부에서 여성의 전반적인 지위에 관하여 비판적으로 연구하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가 “강단에 선 여성들” 이라는 책이었다. 그는 여성들의 참여를 제한하는 말씀들과 적극적인 역할을 장려하는 말씀들을 비교하고자 스스로 말씀을 분석하였다. 이 책에서 윌라드는 자세하게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강단과 지도체제에 적합한 자질들을 자세히 나열하고 목회자의 지위를 가지는 것과 부인과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위치가 서로 조화될 수 없다는 논리를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