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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선교사 순교와 그 증인, 사무엘 마펫 선교사

절제회 | 2017.04.28 15:11 | 조회 149



토마스 선교사 순교기 코리아닷컴 <조선에 부르심을 받다> 저자 스텔라프라이스 교수는 4월 14일에 방한하여 양화진을 방문하고 부산 고신대(이용규 교수), 군목모임 (이정우 군목),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연세대(김유준 교수)에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로 뿌린 복음이 평양대부흥과 한국에 전파되기까지 생생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전하며서 그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상기시키고 믿음의 경주를 다하도록 격려 하였다.

 

토마스 선교사 순교와 그 증인, 사무엘 마펫 선교사 추모

The Martyrdom of Missionary Robert Jermain Thomas,

Commemorating His Witness, Missionary Samuel Moffet

 

 

Stella Price 교수: 토마스 선교사 순교기 <조선에 부르심을 받다> 저자

참조: 국민일보 2016년 9월 2일 이지현 기자: “그가 죽음으로 뿌렸던 성경, 한국교회의 밀알”

국민일보 이지현기자/ Reporter Ji Hyun Lee, Kukmin Daily Newspaper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지체들께.

저는 오늘 로버스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님을 아는 덕분에 이 자리에 강사로 초대받았습니다. 제가 "조선을 위해 부르심을 받다"라는 전기를 쓰게 된 것은 프린스턴 신학교에 계시던 사무엘 마펫 선교사님과 그의 아내, 아일린의 격려와 영감에 힘입은바 큽니다. 샘과 아일린을 만났을 때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믿고 그 말씀을 순종한 분들을 옷자락을 만지는 감격이 컸습니다. 제가 여기서 이렇게 말씀을 나누게 됨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믿음대로 살아갔던 그 분들의 덕분입니다.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와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에 대하여 잠시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읽으면서 배운 것은 여러분들은 앞서 가셨던 선각자들의 말씀을 잘 순종하여 활발하고 성공적인 모임을 이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뛰어나게 이웃을 사랑했던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창립자 프랜시스 윌라드 여사와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회장이셨던 여귀옥 권사님의 본을 여러분들도 잘 따라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술로 인해서 삶의 낙오자가 될뿐더러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알코올과 담배 같은 마약성 식품들은 중독자만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칩니다. 현재 영국에서는 매년 15-29세 젊은이들 32만 명이 술로 인한 질병으로 죽습니다. 이것은 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술로 인해서, 심장병이나 암, 폐질환으로 죽는 것을 포함시키지 않은 숫자입니다.

 

제가 사는 웨일즈에도 술문화는 많은 황폐를 가져오며 중독자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수퍼마켓에서 청년들이 술을 너무 쉽게 구하니 어린 나이에 술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휘청거리는 영국의 국가보건체계에서 어떤 도움을 얻기는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중독에 빠져들게 됨을 안타까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이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 하고 있는 놀라운 일들로 인해 감사를 드리면서, 베드로후서 1:10 말씀으로 서로 격려하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2 Peter 1:10)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심을 확신시켜 주시고, 청년들을 쉽게 사로잡는 그 유혹으로부터 그들을 구해 내기 원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제 이름은 Stella Price 입니다. 웨일스에서 인사드립니다. 웨일스가 어디 인지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웨일스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브리튼 제도/영국 제도에 소속 된 나라 중 하나로 이 제도의 연합국은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 그리고 영국이 있습니다. 영국은 웨일스 바로 옆에 있고 바다를 건너 웨일스의 왼쪽에는 아일랜드가 있습니다. 웨일스는 산과 양이 정말 많습니다. 사람보다 양이 더 많을 정도지만 저는 오늘 양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8,000킬로미터/5,000마일을 날아 온 것은 아닙니다. 저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님의 삶에 대해 전하려고 왔습니다.

 

웨일스인들은 그를 잊었지만 많은 한국 분들은 그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시죠.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가 런던을 떠나 중국으로 향하던 1863년에 웨일스는 정말 살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공장의 어린 아이들을 아주 긴 시간을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일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석탄이나 철강 산업분야에서 일을 했습니다. 사고가 빈번했고 갱도 폭파는 자주 치명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살기 힘들었고 공부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토마스는 뛰어난 학생으로 여러 대학에서 공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랜도버리, 뉴 칼리지, 런던 회중교회 신학교, 그리고 런던 대학입니다. 24살이 되던 해 토마스는 캐롤라인 갓프레이라는 여인과 결혼해 중국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는 주님에 대한 열정이 강했고 새로운 땅에 주님 말씀을 전할 기회에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 시절 서양인들은 무역이 가능한 새로운 경제적 영토를 넓히길 원했고 덕분에 많은 선교사들에게 해외선교 기회가 열렸습니다.

 

 

저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고르돈 대학에서 수업을 가르치던 도중 토마스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웨일스에 계신 어머니를 뵙고 온 남편이 집에 와서 저에게 미션을 주었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던 어느 날 제 남편은 하노버에 있는 작은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이 교회 안에는 어떤 젊은 남성의 그림이 크게 걸려 있었고 그 그림 주변으로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많은 전통 선물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 나무로 만든 지도와 다양한 색상의 물건들. 이 광경이 특이했던 남편은 제게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했고 저도 처음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던 저는 더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전기를 쓰는 것이 공부처럼 느껴졌습니다. 뭔가 써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한 기분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가 이 이야기 쓰기를 원하시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고 그냥 제가 제 자신에게 준 숙제 같았습니다. 사무엘 휴 모페트 (쌤)이라는 분을 인터뷰하였습니다. 저는 그가 1890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오신 선교사님 중 한 분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무엘 오스틴 모페트와 연관이 있는 분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쌤이 평양에서 자란 그의 아들일 것 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쌤이 저에게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의 이야기는 선교에 대한 그의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마음 때문에 전설이 될 수 있었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 저는 매우 흥분하였습니다. 쌤은 계속 말했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한지 약 24년 후에 평양으로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동료 중 한명인 한석진 목사가 셔먼호를 실제로 본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셔먼호 위에 한 남자가 "야소"라고 소리치며 육지에 있던 사람들에게 책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쌤의 아버지인 사무엘 오스틴 모페트가 토마스 목사에게 직접 받은 어떤 사람을 통해서 자기가 받은 성경책을 쌤이 제게 보여줬을 때 저는 정말 감격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1866년 8월 1일에 런던 선교회에 보낸 편지 중 하나에는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평민들은 중국의 한자를 북쪽 (현지 만주)에 사는 중국인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올해 1월에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 외교부에서 일하는 어떤 사람이 내게 외국 선교사 (편집자 주: 그것은 바로 토마스 선교사)가 한국에서 전달했던 성경책 같은 요한복음을 제발 구해달라고 중국어로 적힌 메모를 전달했었다."

 

그때 사무엘 휴 모페트는 아버지인 사무엘 오스틴 모페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들을 내게 말해주었고 그를 통해 그의 아버지가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씨앗들을 통해 열매를 거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책들을 통해 복음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사무엘은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가 책을 통해서 얻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직접 그 사건들을 경험하거나 그 사건들과 연관된 사람들에게 들으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쌤의 얘기를 들으면서 밝아진 그의 얼굴을 보니 그가 평생 얼마나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겼는지 저는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 모펫과 그의 아내 아이린과 친해지며 저는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마치 히브리서에서나 읽을 수 있는 주님의 목격자들과 비슷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2:1-3 (Hebrews 12: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토마스는 나이 27세에, 그리고 모펫은 97년의 긴 생애를 마치고, 각각 돌아가셨습니다. 저희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비록 두 분이, 삶의 여정의 길이는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삶을 헌신하셨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에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삶을 헌신한 아들이 아닙니까! 왜 이렇게나 일찍 데려가시나요?" 슬픔이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을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죽기 1년 전, 그의 아내 케롤라인은 아기를 유산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토마스의 부모님은, 손주와 며느리에 이어 아들마저 잃게 된 것입니다. 그의 시신은 평양 대동강에 위치한 쑥섬에 있었기에, 아들을 묻지도, 무덤에 꽃 한 송이조차 놓아 줄 수 없었습니다. 매우 비극적인 죽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토마스 선교사를 마치 땅 깊숙이 심은 하나의 밀알과 같이 사용하셔서 그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아가는 데에 사용하셨습니다.

 

자, 이제 2011년도로 빨리 감기를 해볼까요? 저와 제 남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미국에 있는 가족들과 집을 떠나, 저희의 모국인 웨일즈로 가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저희는 토마스가 살던 집을 구입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버려진 집이었기에, 복구 기간이 3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동안 미국에서 날라온 저희 가구들은 마당 컨테이너에 실려 있었습니다. 물이 세는 침실 천장도 수리 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하노버 교회에서 사역을 하였고, 많은 한인 방문객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님의 헌신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러 한국에서부터 오셨던 것 입니다.

 

저희는 또한 웨일스에 복음을 전파하러 온 많은 한국인들과도 친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은 웨일스에 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길 원하는 규대라는 분이 저희를 방문 했습니다. 그의 방문을 통해 저희는 이곳, 우리의 고향으로 한국인들이 선교하러 오는 것이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복음의 씨앗들을 통한 열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의 부모가 이 열매들을 봤으면 얼마나 좋을까도 생각했습니다. 우리와 달리 그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계획하셨고 그들의 아들의 희생을 어떻게 사용할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즈푸에서 (옌타이의 옛이름) 조선으로 두 번 선교 여행을 떠났습니다. 첫 여행에 그는 중국에서 범선을 빌려 조선 서북 지역과 중국 만주의 랴오둥 반도 사이의 해변을 지나 백령도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배가 난파된 후 그는 결국 북경에 있는 런던 선교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두 번째 여행에는 제너럴 셔먼호라는 무역선에 등선하였는데, 그는 어떤 배에 탔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을 봐서 밀수선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그때 밀수는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원래 로즈 제독의 배에서 통역을 요청 받았지만 일이 생겨 그 배는 베트남에 있는 사이공으로 항해해서 셔먼호에 탔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에 조선으로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선장과 선원들은 조선 사람들의 경고들을 무시하고 지역에 가장 큰 항구를 찾아가는 것을 고집하였는데, 배는 결국 대동강 기슭에서 멈추어야 했고 이에 따라 조선 군사들과의 대립으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결국 조선인들은 작은 배들을 묶은 다음 불을 질러 셔먼호를 향해 떠나보냈습니다.

 

배에 불이 붙자 타고 있던 외국인들은 전부 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고, 기다리고 있던 조선병사들의 창과 칼에 선장, 중국 선원들, 소수의 승객, 또한 토마스 선교사까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 최소 두 명의 조선인들이 토마스 선교사를 통해 성경을 전해 받은 것으로 알려지는데, 그 중 한명은 최치량이라는 어린 소년이었고, 한명은 사형집행장인 박영식이였습니다. 박영식은 받은 성경을 트로피 삼아 책의 종이들을 이용해 그의 집 벽지로 사용하였습니다. 많은 해가 지난 후 최치랑은 박영식의 집을 사서 마포삼열 (馬布三悅) (Samuel Austin Moffet) 목사에게 한문으로 된 성경 벽지를 보여주었는데, 이 집이 나중에 평양의 첫 개신교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장대현 교회)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히브리서에 나와 있는 우리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달려갔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경주는 빠르고 짧았고, 마포삼열 목사의 경주는 길었습니다. 저희 모두 또한 각자 뛰어야 할 경주가 있고 아무도 그 경주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그저 장기판 위에 이리저리 치이는 장기 조각들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모두 각자 받은 다양한 은사가 있고, 서로 다른 환경과 상황들에 놓여 있으며, 각자 다른 문화를 선물 받았고, 결국 다 각자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저희는 토기장이의 손에 담긴 찰흙덩어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우릴 만드신 토기장이는 선하시고 관대하셔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토마스 선교사와 같이 어려울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중국에 있는 많은 토마스 선교사의 동료들은 이렇게 위험한 시기에 조선에 선교를 하러 가는 것은 매우 큰 실수라고 여겼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열정적이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예민하였으며, 언어에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언어의 은사를 복음을 전파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그의 친절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높은 사람들로부터 순박한 농부들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와도 함께 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고, 조선 대사들과도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비전 또한 광대했습니다. 그는 중국과 조선을 넘어 만주와 몽골, 타타르족까지 선교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의 활발한 정신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드릴 수 있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계획들과 소망들은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토마스 선교사는 임박한 죽음을 재촉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많은 사람들처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알기를 간구했습니다. 그가 중국에 있을 때 그는 사슴고기를 즐겨 먹었으며, 어린 여동생들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의 아내에게 쓴 편지들에 애정이 담긴 "사랑하는 Carrie…"와 같은 문장들을 보면 그가 그의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위해서 그는 그의 목숨과 삶이 그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영혼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위험은 세상 어디에든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위험한 상황에 달려들지는 않지만, 어떤 이들은 힘든 상황 속에서 어려운 선택들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시대 때 마포삼열 목사의 아버지는 조선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때에 일본의 신도 종교와 예식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은 조선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이 감금, 고문, 또한 죽임을 당했던 것으로 알려 졌습니다. 그의 조선을 향한 사랑은 피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의지는 강했고, 다른 많은 선교사들과 같이,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조선인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있을 것을 추구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1절에 나온 것 처럼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1-12 (2 Corinthians 4:11-12)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교사님의 삶에 대하여 연구할 때 엄청난 기쁨이 있었습니다, 휜 장갑을 끼고 원본 편지들을 읽어볼 때, 저는 발견의 흥분뿐만 아니라, 토마스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과 동료들의 아픔과 기쁨들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사하게 저와 제 남편 또한 웨일스에서 사역하기 위해 저희의 가족들을 미국에 남기고 떠날 때 눈물을 흘렸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와 그의 아내가 중국으로 떠날 때 그들은 결혼, 신혼여행, 미래의 사역에 대한 들뜬 마음이 있는 반면, 그들의 가족들을 장기간 보지 못할 생각 또한 있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저와 여러분과 많이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는 가족을 꾸리길 원했고, 그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인생을 즐기기 원했으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창조주이며 왕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섬기기 위해 겸손하게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았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아내 Carrie는 상해에 도착하고 얼마 후 1864년 3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그녀가 임종할 때 같이 있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습기가 많은 다가오는 여름을 대비해서 더 시원하고 쉴 수 있는 집을 구하려 웨일스 선교사 Griffin John을 만나러 난징을 방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해에서는 런던 선교회 대표였던 무어헤드 목사의 집에 방을 빌려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상해로 돌아와 유산으로 인해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직업을 변경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아내의 죽음에 대한 슬픔에서 다시 회복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언어능력과 사람을 대하는 소질 덕분에, 즈푸( 옌타이) 세관원으로 일해 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토마스 선교사가 쓴 편지를 읽으면 저는 아직도 놀라곤 합니다. 모든 편지를 보여드릴 순 없겠지만 아래는 그가 사랑하는 아내 Carrie의 묘비를 준비하고 있을 때에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몇 줄입니다.

 

편지는 그의 여동생 랠리에 대한 몇 마디로 시작합니다. "랠리가 회복 중이라니 너무 기쁘네요. 톨키나 다른 여행지에 가서 쉼을 취하는 것이 그녀의 건강 회복을 도와준다면 , 어머니와 함께 드봉셔로 가는 것을 찬성하겠어요.... 묘비를 만들 때 실수하지 말아주세요- 꾸밈없으면서 우아하게- 십자가와 교회의 모습으로 부탁해요. 아무것도 추가하거나 변경하지 말고 Godfrey부인 (케리의 어머니)께는 아무 말 하지 말아 주세요. 친애하는 Annie에게는 내가 선물로 보낼 모피 토시가 가을 전에 도착 할 예정이라고 전해주세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착용해도 되요. 랠리에게는 어민 토시를 보내겠어요." 저희는 많은 이야기들을 읽고 잊어버립니다.

 

그렇지만 토마스 선교사의 이야기는 듣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까지도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 저희 가운데 머물고 있습니다. 몇 달 전에, 저는 한 여성에게서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바로 토마스 선교사님으로부터 성경책을 받은 최지량의 후손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000입니다. 제 조상님에 대한 소식을 드디어 찾을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그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왔지만, 저는 많은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제 고조부 할아버지를 포함한 그의 자녀들은 모두 무신론자였습니다. 한국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 제 가족은 남쪽으로 향했고, 가난과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제 어머니께서는 군인에게 성폭행을 당하셨고, 질병으로 인해 동생들을 잃었습니다. 그 당시 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갈라서신 이후부터 저희 가정은 깨져버렸습니다. 5년 전, 저는 거듭나고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최근에, 제 고조부 할아버지가 제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하고, 그에 대해 더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 책에서 찾을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토마스의 유산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토마스와 그의 부모님의 희생을 낭비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셨습니다. 평양에는 토마스 선교사를 기억하는 교회도 세워졌습니다. 현재는 장대현 교회 자리에 평양 과학 기술 대학교 (PUST)가 세워졌지만, 삶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선교자들이 섬기고 있는 곳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할 수 없지만, 그들은 겸손하게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일하심 속에서, 모펫, 알렌, 언더우드, 리 선교사 등의 헌신과 희생은 절대 낭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 모인 저희는 그 분들의 열매입니다. 이제는 저희가 이 믿음의 경주를 달려야 합니다. 저희가 이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을 매 순간 기억 합시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렇게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5:2 (Ephesians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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