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독교여자 절제회 - KWCTU

칼럼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17)

한동수 | 2014.04.09 22:57 | 조회 7934
제가 절제운동을 알기 시작한지 이제 2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절제회 장학생으로 공부한 것에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주께 부름 받는 목사로서 한국교회의 거룩하고 절제 있는 삶을 위해 강단에서 바른 복음을 선포할 책임이 있다고 느끼고 있기에 매주 그 부담으로 한 주간 씨름하여 한 편의 설교를 탄생시킵니다.
이제는 그렇게 제 땀과 수고가 담긴 이 설교들을 절제회 회원들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설교의 한 대목들을 계속해서 이 홈페이지에 올리고자 합니다. 한 마음으로 이 글을 읽고 기도하면서 자기의 삶을 돌아볼 뿐 아니라, 이 땅의 거룩함을 위해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요한일서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설교 동영상을 보시고자 하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들어가며 

 

사도는 요한일서에서 2장 15-17절을 말하기에 앞서 212-14절에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그들이 얻고 누리는 영광스러운 복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알려준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한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결정적인 승리로 말미암아 이미 악한 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들이다.

사도의 어조는 간결하지만 명확하고, 성도들을 위로하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이 위로를 듣는 성도들은 단지 힘을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들의 정체성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사실 사도 요한은 15절 이하의 강력한 말씀을 하기에 앞서, 2장 12-14절에서 성도들을 위로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이 강력한 권면을 받아들일 만한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만큼 훨씬 좋은 예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사도가 212-14절에서 말씀한 놀라운 신분을 얻게 된 성도들이라면 이제 당연히 15-17절과 같은 강도 높은 권면을 들어야만 한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영광스러운 지위에 대한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영광스러운 지위를 그들에게 허락하신 후에 그들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215절 이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5절에서 사도의 권면은 짧고 명확하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사도의 어법에서 세상이 거듭 강조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다. 사실상,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지만, 사도는 의도적으로 뒷구절을 덧붙임으로써 우리가 사랑할 가능성이 있는 대상을 매우 구체화시키고 있다.

우리에게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세상은 성경에서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할 때, 그 세상은 나쁜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미워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하실 때에도 세상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더욱이 우리가 오늘도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잠을 자는 곳도 세상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여전히 은혜를 부으셔서 우리로 그 일반은총을 누리며 살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반드시 나쁘게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사도가 우리에게 이처럼 강력한 권면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우리에게 사랑하지 말라고 말하는 세상은 죄로 오염된 세상, 하나님을 반역하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손에 붙들린 세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 안에 온갖 부조리와 불법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이 가득한 세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도가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은 이렇게 극단적인 면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가 말하는 세상은 그 시작과 끝에 있어서 덧없이 사라지고 말 일시적인 가치를 염두에 두고 있다. 반드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추하고 악한 죄성이 깃든 요소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와 달과 꽃과 나무는 세상이고 세상에 속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악하지 않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은 아니다. 재물과 건강과 명예와 학식과 편리한 문명은 세상이고 세상에 속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은 아니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결혼, 직업, 그리고 사회적 제도와 각종 건강한 문화산업들은 세상이고 세상에 속한 것들이다. 그것들도 그 자체로 악하지 않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은 아니다.

여기에서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의 사랑에 주의하자. 이 명령은 이 모든 세상의 것들을 누리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만물을 바라보며 참 아름다워라라는 찬송을 부르는 것이 정당하다. 우리의 삶에 필요해서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은총도 감사히 누려야 한다. 그리고 인류가 만들어 내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각종 제도들도 선하게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랑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도가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것들을 귀하게 여기다라는 의미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들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단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논리상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사도의 권면이 의미하는 바가 아닌 것을 먼저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우선, 사도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을 할 때,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창조의 영역이나 일반은총의 영역들을 누리지 말거나 그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재물이나 사람의 건강, 또는 학식 등을 언급하거나 그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자체를 매우 세속적이고 불순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치 정치에 몸을 담아서는 안 된다거나 음악, 미술, 체육 등의 예체능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들도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사도의 권면은 이러한 것들을 원천적으로 금지시키는 명령이 아니다. 사도가 염려하는 것은 그것들을 사랑하여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거나, 바르지 않은 방법들로 그것들을 영위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오류는 너무 극단적인 경우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술을 많이 사랑하지 않거나, 요즘 젊은이들처럼 클럽에 춤을 추러 다니지 않거나, 도박을 하지 않거나, 어떤 중독에 빠지지 않았다고 할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자긍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자기의에 빠져서 자기가 꽤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도가 우리에게 금지시키는 것은 이런 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사도의 의도를 살펴보면, 사도는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윤리적으로 도가 지나친 방종의 삶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바로 사도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이유이다. 사도는 15절 하반절에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있지 않다고 말씀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말 어법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다. 그러나 헬라어의 어법에서는 두 가지 의미가 가능하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어가 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목적어가 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이 구절에서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대조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 사도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마음이 하나님께 사로잡힐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세상 중 하나를 택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우상숭배의 문제로까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나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사랑하는 세상이 우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오감을 지배하고 다스리기 때문에 철저하게 세상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제 사도는 이것을 16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한다.

 

세상에 있는 것들 01 육신의 정욕

16절에서 사도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난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사도는 우리가 사랑하는 세상에 있는 것들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이다. 주의 깊게 볼 것은, 사도가 이 세 가지를 말할 때 이것들이 우리 속에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말하지 않고, 이것들을 우리가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말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이미 이 세 가지가 있다. 그리고 아담의 범죄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의 오염된 본성 속에 이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의 영역들도 아니다. 우리가 아끼고 누려도 되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죄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들어온 것들이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인류가 처음 죄를 범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들이기도 하다. 이 점은 잠시 후에 설명하기로 한다.

사도가 제시하는 첫 번째 세상의 것은 육신의 정욕이다. 여기에서 정욕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본래 욕구라는 중성적인 의미의 단어인데,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느냐에 따라 바람또는 소원이 되기도 하고, “욕심또는 욕망이 되기도 한다. 사도가 경계하는 것은 육체의 감각에 의존하고 그것에 지배되는 욕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건전한 본능적인 욕구들을 주셨다. 식욕, 수면욕, 성욕 등이 그것들이다. 우리의 건강을 위해 반드시 음식을 먹고 잠을 자야 하며, 건강한 부부관계 안에서 자녀의 출산을 위해 아름다운 성을 누려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본능적인 욕구들이 도를 넘어서게 되면 그것이 곧 육신의 정욕이 되는 것이다. 식욕이 지나치면 탐식을 낳거나, 미식가를 낳게 된다.

사람들 중에는 유독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한국인들은 특히 먹는 것을 매우 즐기는 민족이기도 하다.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면서 또 다른 먹거리 이야기를 한다. 과거에 잘 못 먹고 산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고 하는 양, 요즘에는 온통 먹거리가 TV와 신문과 SNS를 도배하고 있다. 매일 그날 필요한 양식에 감사하고, 때로는 적당하고 건강한 식단을 식도락으로 즐길 줄 아는 풍미를 넘어서서 너무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우리의 식욕에 투자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육신의 정욕을 사랑하는 것이다. 식욕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청원이 있다. 이것은 매일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양식을 주실 것에 대한 청원이지만, 필요 이상의 양식을 공동체와 함께 나누는 정신을 내포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먹고 마시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달려 있음을 고백하고 시인하면서 그것에 마음 두지 않겠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먹을 때조차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가르친다. 혹시 먹는 생각에 사로잡히느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 경계하는 육신의 정욕의 문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식욕뿐만 아니라, 성욕이 도를 넘어 육신의 정욕이 될 때, 그것은 현대의 수많은 성적 범죄들을 양산한다. 성적인 욕구는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되어야 하고, 아름답게 나누고 즐겨야 하지만, 결혼 관계 밖에서 무차별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스스로 자제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사랑하기만 하면 결혼과 상관없이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혼을 할 것이기 때문에 그 전에 미리 성관계를 가져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현재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 그렇게 가르치는가? 결혼이라는 울타리 없이 자기들의 사랑이 순전하게 보호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성욕이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만 누려지고 보호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자기의 아내와 남편을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다. 성에 대한 기본 개념도 없고, 언약의 개념도 없다. 결혼은 언약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맹세하고 스스로 자기의 몸을 언약 상대방에게 매어 두겠다는 성스러운 다짐을 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언약은 하나의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 같다.

구약을 읽어보면, 언약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매우 엄격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실수로 맺은 언약이라도 언약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를 속이고 언약을 맺었을 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속았던지 어떻든지 간에 그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원하셨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결혼이라는 언약을 우습게 여기며, 그 언약이 요구하는 성적 순결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결혼을 할 때는 기독교인으로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 목사를 주례로 세우고, 예배당을 빌려 식을 올린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과 여러 허다한 증인들 앞에서 엄숙하고 존엄한 언약 체결식이라는 인식은 턱없이 부족하고, 가볍디 가벼운 이벤트성으로 치르는 행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점점 더해지고 있다. 그러니 결혼 이후에, 주체할 수 없는 자기의 성욕을 결혼 관계 밖에서 자유롭게 분출하면서 그것을 가리켜 사랑이니 자유니 하는 말로 포장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틀림없이 육신의 정욕일 뿐이다.

재물에 대한 욕구도 현대인들이 넘어지기 쉬운 가장 치명적인 걸림돌 중의 하나이다. 현대사회는 그야말로 돈이면 뭐든 다 되거나, 돈이 없어 우울해지는 사회로 치닫고 있다. 돈은 이제 어느덧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는 도구를 넘어 그 자체가 선()이 되어 버리는 듯하다. 성도들도 돈의 노예가 되기 쉬운 사회구조이다. 항상 쪼들려 살아야 하는 생활에서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욕구는 강해지는 반면, 그 돈을 하나님께 기꺼이 드리거나 누군가에게 나누고자 하는 열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십일조와 각종 예물 드림에 대한 강조를 하는 것이 성도들의 귀에 거슬리기 시작한 것은 한국사회가 경제적으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한 이후이다. 목사가 언제부터 십일조에 대한 강조를 미안한 마음으로 하기 시작했는지 보라.

구제와 나눔은 또한 어떠한가? 서로 먹고 살기 힘든 삶의 정황도 있지만, 40-50년 전이 지금보다 더 낫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성도들에게는 구제와 나눔의 정신이 있었다. 거창하지 않아도 성도의 사랑과 정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사실상 더 나은 삶을 살면서도 구제와 나눔에 인색하다. 교회가 행하는 구제는 본래 주머닛돈을 모아 행하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어느덧 바자회가 대체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볼 때 우리는 현재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외에도 우리 육신의 정욕에 해당하는 것들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덧없이 사라질 이러한 것들로, 덧없이 사라질 우리의 육신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을 끊임없이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욕구가 어느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것이 욕심사랑의 수준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하라는 사도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세상에 있는 것들 02 안목의 정욕

사도가 경계하는 두 번째는 안목의 정욕이다. 보는 것에 대한 욕구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도 맹독을 가진 정욕이기도 하고,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가교 역할을 하는 정욕이기도 하다.

사도가 편지를 쓰던 로마 사회에도 화려한 것을 선호하고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겠지만, 현대사회는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 본래 시각은 우리 몸에서 전체 감각의 70%를 차지할 만큼 절대적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그야말로 보는 것과 보이는 것에 민감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 한국 사회만의 몇 가지 요인들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가진 체면 문화이다. 뿌리 깊은 유교의 전통은 누군가에 잘 보이기를 바라는 체면을 중시한다. 냉수를 먹고도 고기를 먹은 채 하기 위해 이쑤시개를 들고 있는 것이 소위 우리네 선비 문화이다. 그러다보니, 나의 외모와 지식과 태도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매우 민감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도 그의 외모를 통해 하려고 하는 경향이 짙다. 누군가에게 절제되고 단정하며 품위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도를 넘어선 겉치레다.

둘째는 우리가 가진 소비주의 문화이다. 현대인들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맹독 중의 하나는 단연코 소비주의이다. 소비가 미덕인 시대가 찾아왔다. 소비욕이 하나의 본능처럼 여겨지는 시대이다. 여기에 체면문화와 보이기식 문화가 더해지다 보니 서로 경쟁적으로 상품을 사서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 다른 사람에 비해 덜한 것을 사용하고 있을 때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감을 느낀다고 한다. 더 낫지는 못해도 비등하게는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네 생각이다. 모두가 광대역 LTE-A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대에 자기 혼자 3G2G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에 각종 광고매체들은 우리의 안목의 정욕을 제대로 공략하고 있다. 우리의 정욕이 그들을 살찌게 하고 있다. 연일 쏟아지는 광고들은 우리를 속이며 소비를 부추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현대카드.” 일에만 매여 있지 말고 마음껏 카드를 긁으며 살라는 것이다. “세상은 빠른 자들에 의해 변해왔다. SK 텔레콤.” 그 휴대폰 하나로 세상을 바꾸는 선구자와 개척자가 될 수 있을 것인 양 우리를 속인다.

우리의 안목의 정욕Bulls Eye를 공략하는 가장 확실한 광고는 술 광고이다. 무더운 여름 맥주 한 캔이면 마치 모든 더위가 날아갈 것 같이 시원하게 터지는 소리가 눈과 귀를 함께 자극한다. 또한 늘씬한 여자 연예인들은 하나같이 가슴 파이고 배꼽이 드러난 상의에 핫팬츠를 입은 채 소주병을 들고 모니터와 포스터에 나타나 남자들을 유혹한다. 게다가 저속하고 야릇한 멘트와 함께 남자들을 술독에 빠뜨리는 게 소주 광고주들의 전략이다. 이러한 광고에 온 국민이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맥주를 음료로 여기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우리를 보고 보이는 데 더욱 민감하게 만드는 세 번째 요인은 자극적인 동영상과 이미지의 발달이다. 뮤직비디오들은 점점 자극적이고 음란한 수준으로 조금씩 수위를 높이고 있다. 영화들도 폭력과 음란의 수위를 해마다 더 높이고 있다. TV 드라마와 예능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이제는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TV를 시청하는 것이 민망한 시대가 되었는데, 그것을 민망하다고 말하면 고루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얼마나 더 자극적이 되면 우리가 만족할까? 얼마나 더 우리의 말초신경을 건드려 주어야 우리의 안목의 정욕이 흡족하다고 할 것인가? 사도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우리는 그것들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것들 03 이생의 자랑

사도가 경계하는 마지막 항목은 이생의 자랑이다. 나를 존귀하게 여기고, 나를 자랑하며,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자존감을 주신 것이 사실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들로서 이 자존감을 지킬 뿐 아니라, 더 성숙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도를 넘어선 야망으로 변하면 그것은 곧 이생의 자랑이 된다.

여기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재물과 지식과 학벌과 출신 배경을 자랑하는 원초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 집은 몇 평, 우리 차종은 OOO, 내가 졸업한 학교 또는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OOO, 내가 다니는 회사는 OOO 등등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초적인 것을 넘어서면 그 다음엔 관계를 자랑한다. 자기가 어느 조직에서 어떤 영향력을 갖는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지인들 중에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지, 또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이룬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등등을 자랑하면 이것은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의 자랑이다.

이 모든 것의 뿌리에 허영심이 있다. 자기의 영광과 영화를 추구하고 높아지려는 야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를 빼앗게 된다. 교회 안에서조차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허영심이 존재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는 서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싸움의 장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생의 자랑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요소라고 경계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세 가지 항목들을 살펴보았다. 이것들은 얼핏 보면, 현대 문화에 젖어들어 살아가는 삶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들은 영적인 문제이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단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집요하게 현대인들의 삶을 파고들고 있다. 문화에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조급함을 심어준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촌스럽고, 고루하며, 진보적이지 못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다. 마치 그것들을 따라가는 것이 trendy하고 fancy한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그러나 우리는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것을 단순히 문화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에 속한 것들 중에서 굳이 이 세 가지만을 언급한 사도에게 선명한 의도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왜 굳이 이 세 가지만 언급했을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과연 이 세 가지가 전부란 말인가? 거기에는 의도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세 가지 항목들은 모두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서 발견되는 것들이다. 창세기 35-6은 말씀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먹음직도 하고에는 육신의 정욕이, “보암직도 하고에는 안목의 정욕이, 그리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에는 이생의 자랑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결국 하와는 이 유혹들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도는 인류의 원죄를 기억하게 하면서 우리에게 훨씬 더 근본적이고 주의 깊은 경각심을 요구한다. 사도는 이것들이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고, 세상에서 왔다고 말한다. 첫 인류의 범죄로부터 온 인류의 삶 속에 뿌리 깊게 자리하게 된 세상의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아직 죄를 알지도 못하던 아담과 하와도 이것들에 넘어졌는데, 이미 오염된 본성을 가진 우리로서는 얼마나 더 쉽게 넘어질 수 있겠는가?

 

영원히 살며 영원을 사모하는 성도들

이제 사도는 17에서 결론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 세상도,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추구하고 갖고 싶어 하는 세상의 것들이 모두 덧없이 지나가는 것들이라고 말씀한다. 잠시 잠깐 누릴 수 있지만, 곧 사라질 것들이다. 안개처럼, 그리고 거품처럼 없어질 것들이다. 그것을 영원히 누릴 수 없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갖고 싶어 한다.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은 즐거움과 기쁨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을 사랑하여 마음껏 누림으로써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혀 무엇인가를 더 많이 소유하고 누릴 때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크고 지속적인 기쁨을 가져다주는가? 단언컨대, 그 즐거움이란 말초적이며 일시적이다. 그것들처럼 덧없는 것이 없고, 오히려 우리 영혼 속에 공허감과 허망함을 가져다주는 경우들이 훨씬 더 많이 있다.

이런 것들과 비교하면서, 사도는 성도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우리는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다. 몇 주 전에 함께 나눈 것과 같이, 우리가 누리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하다는 것은 시간적인 의미만 있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함을 공급받으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가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다. 우리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더 많이 아는 것,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영원히 거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바라고 누리는 데에는 부요함이 있다. 풍성하고 영원하고 역동적인 기쁨이 있다. 말초적이지 않고 고상하고 품위 있는 기쁨이 있다. 전도서 311은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단지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을 억누르며 그것들을 사랑하지 말자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신앙에만 머물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바라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자랑, 그리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등으로 무장해야 한다. 억제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바른 대안을 찾아 그것을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결론은 하지 말라에서 끝나지 않고 하라로 마무리되어야 할 것이다.

 

맺는 말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에 편승하지 않는다. 세상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지금까지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들의 마음이 건전하고 건강한 욕구를 넘어서서 욕심을 부리고 있고, 변태적인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경고하신다. 이 모든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육신적인 만족보다는 영적인 복을 추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며, 이생의 것들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갖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진 삶들이다. 출생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알고 있는 것은 중생일 뿐이며, 그리스도인이 관심을 가지는 부요함이란 영광의 풍성함이며, 그들이 추구하는 지식은 인간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다. 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단체는 어떤 고상한 모임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곳이며 교회이며 성도들 자체이다. 그들은 그저 겸손해지고 낮아지기만을 원한다. 그들이 갈망하는 명예란 사람들 사이에서만 찾을 수 있는 위대한 이름 같은 것이 아닌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것이며, 마태복음 25:21에 주어진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와 같은 축복된 말씀을 듣게 될 장차의 그날을 기대하면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pp.35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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