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독교여자 절제회 - KWCTU

말씀설교

산상보훈 (마태복음 5: 1-12) 칼빈 주석 번역

절제회 | 2018.07.23 11:30 | 조회 5526

마태복음 5장 1-12절 산상보훈 말씀 칼빈 주석 번역

출처: https://www.ccel.org/ccel/calvin/https://www.ccel.org/ccel/calvin/comment3/comm_vol31/htm/ix.xli.htmcomment3/comm_vol31/htm/ix.xli.htm

산상보훈 성경 본문
마태복음 5:1-12 산상수훈 누가복음 6:20-26

마태복음 5 장

제 5 장

복이 있는 사람(눅 6:20-23)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누가복음 6:20-26

복과 화를 선포하시다(마 5:1-12)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산상보훈에 대한 칼빈 주석

마태복음 5:1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경건하고 겸손한 독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의 요약을 보며 기뻐할 것이다.  그 첫번째 가르침은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그가 말씀하신 것이다.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셨을까 보자. 우리는 대부분 사람들이, 지식있는 사람들까지도, 불편이 없고, 원하는 것을 다 가졌고, 기쁘고 안이한 삶을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오류를 붙든다.  적어도, 일반적 견해는 행복은 현재 형편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이 십자가를 지는데 익숙하게 하기 위하여, 육신을 따라서 쉽고 번창하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잘못된 견해를 드러내신다. 십자가와 환란의 고통을 감해주고 달콤하게 만드는 유일한 위로는 비참함 가운데서도 우리의 인내가 주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고, 행복한 결과가 곧 있을 것이라서 우리는 행복하다는 신념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보통 견해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의 행복과 다르며,육신의 정욕과 다른 철학을 배워야 한다.   육신의 이성은 그리스도께서 여기 가르치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 가르침의 주된 목적은 악한 자들의 비난에 눌렸을 때, 또 갖은 재앙에 놓였을 때, 불행하지 않는다는 것 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현 상황에 의해서 인간의 행복을 가늠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며, 경건한 자들의 고통이 곧 변해서 낳아질 것을 증명할 뿐 아니라, 그의 백성들을 인내하라고 격려하며 보상의 소망을 붙들라는 것이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누가복음 6:20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많은 사람의 가난은 저주받은 것이요, 불행하다.  마태는 그리스도의 의도를 더 명백하게 드러낸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으로 눌리나, 속으로는 교만하고 잔인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을 받고 연단되고 복종하며,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내적 겸손함을 가지고,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보호받기 위하여 맡기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다른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를 자기 것으로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고, 육신의 모든 자신을 전적으로 비워 그들의 가난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누가와 마태의 단어들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난한 자들이란, 환난으로 인하여 눌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가르킨다.  유일한 차이는 마태는 행복을 십자가 훈련 아래 겸손하기를 배운 자들에게 국한 시킨다는 점이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백성의 마음을 근거 없는 믿음으로 부풀게 하지 않고, 스토익들 같이 감정 없는 완악함으로 강퍅하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영생의 소망으로 기쁘게 하며, 그들에게 확신을 줌으로 인내하게 일깨워서 그들로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우리의 주목을 받아야 한다.  자신 안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을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한다. 한편, 심령이 상하고 절망으로 가득해서, 하나님께 불평하는 자들은 교만하고 오만한 영을 가진 자들이다.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문장은 그 앞에 말씀과 가까이 연결되어 있어, 그 말씀의 부속이거나 확증 같은 것이다.  보통 관점은 재앙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항상 애통과 슬픔을 가지고 다닌다는 생각으로부터 나온다.  실제로, 어떤 것도 행복과 애통함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불행하지 않다고 주장하신다.  그는 보여주시기를, 그 애통함 자체가 행복한 삶에 기여한다고 한다.  이는 그들이 영원한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준비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으로부터만 진실한 위로를 흥미를 가지고 추구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말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3-5).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함으로 그가 뜻하는 것은 부드럽고 젊잖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쉽게 상처로 하여 화내지 않고, 어떤 것도 참아내면서, 악한 자들의 행동을 따라 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에게는 매우 바보스럽게 보이지만, 이 땅을 기업으로 약속하신다.  어떤 공격도 따끔히 물리치며, 그들의 손은 상함 받은 것을 복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 오히려 그들 스스로 땅을 다스릴 자라고 주장하지 않을까?  경험상으로 볼 때 악한 자들의 악을 친절하게 대응하면, 그들은 더욱더 대담해지고 무례해 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친히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심으로 당당하게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음으로, 해를 받으면 무섭게 응징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을 “전쟁 무기”를 가지고 지킨다 (에스겔 32:27).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우리 생명의 보호자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서 남아 있는 모든 것을 그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야 한다 (시편 17:8).  만약 우리가 그의 양 떼에 속하려면, 우리는 양이 되어야 한다. 방금 말한 것이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반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섭게 흉포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불안감으로 어떻게 흔들리는지 생각해 보라고 나는 제안할 수 있다.  그들이 폭풍 같은 삶을 살면서, 그들은 백 번도 더 땅의 주인 노릇을 했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면에 그들이 자기 발을 자기들의 것이라는 것에 두지 못해도, 그들은 땅에서 조용한 삶의 거처를 누린다.  이것은 상상적인 소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거주하는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임을 그들이 알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하나님의 손은 그들을 악한 자들의 폭력과 분노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서 간섭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갖가지 종류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고 악한 자들의 악의에 대상이요, 여러 가지 위험에 둘러 싸여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안전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첫 맛을 이미 적지만 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날 세상의 상속자로 소유하기까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을 칼빈은 수사학적 표현으로 보고, 그 뜻하는 바는 가난을 경험한다는 것과 생활에서 필요한 것이 없는 것과 심지어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는 것까지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마태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하여 한 종류의 사람이 모든 다른 사람들과 구별한다. 비록 그들이 염려하거나, 신음하거나, 합당한 것을 갈망해도 그들이 부적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그는 강조한다.
“비록 그들의 바램이 지극히 겸손하며, 그들이 합당한 것 외에 어떤 것도 주어지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그들은 배고픔으로 굶주린 사람들처럼 말라가는 현상에 여전이 놓여있는 바로 그들이 복되도다.” 비록 고통스러운 고민이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도, 이는 행복을 위한 준비라는 것이다.  이는 마침내 그들은 만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정당한 욕망을 곧 만족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성처녀의 노래에서 배우듯이, 그는 배고픈 자를 좋은 것으로 채우실 것이다 (누가복음 1:53).

7.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역설은 또한 사람의 판단과 상반된다. 세상은 자기의 안위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을 복되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고통을 견디도록 준비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함께 하는 사람들, 비참한 사람들을 돕고, 고통 받는 자들과 기꺼이 함께 하며, 자신들을 그들과 같은 사랑으로 옷 입고, 그들을 더 잘 돕기 위하여 기쁘게 노력하는 자들을 복되다고 하신다.  그는 덧붙인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라.  하나님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행을 실천하도록 허락하신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렇다.  비록 온 세상이 감사를 모르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 최악의 보상을 할 때도 있지만,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며 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위해서 은혜를 베푸셨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때에 은혜롭고 긍휼이 풍성하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편 103:8; 145:8).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리스도께서 여기 하신 말씀이 모든 사람의 판단과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하여 공곰히 생각하게 된다.  마음의 청결이란 모든 덕의 어머니와 같이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 명의 한 명도 빠짐없이 가장 귀한 덕의 자리에 궤휼을 앉힌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보통 복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속임수를 성공적으로 사용하는데 천재성을 발휘하며, 그들과 교제하는 사람들을 간접적 방법으로 기술 좋게 이용한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적 이성과 전혀 동의하지 않으시고, 오직 속이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 사람들과 신실하게 대화하는 사람, 그들의 마음에 느끼지 않는 말이나 표정을 짓지 않는 사람을 복되다고 하신다. 단순한 사람들은 주의력이 부족하다고, 그리고 자신들을 더 예리하게 관찰하지 않는다고 조롱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더 높은 것을 바라보게 이끄시며, 만약 그들이 이 세상에서 속이는 꾀를 가지지 않는다면, 하늘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즐거워하게 될 것을 생각하라고 명하신다.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라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평화를 구할 뿐 아니라, 그들의 능력 안에 있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사이에서 차이를 잘 해결하려고 노력해서, 논쟁을 피하며,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도록 충고하는 자들이며, 증오와 싸움의 모든 기회를 제거하는 자들을 뜻하신다.
이 말씀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을 화해시키는 것은 힘들고 귀찮은 일이지만, 부드러운 성품을 지닌 사람들은 화평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연구하며 모든 방향에서 오는 비방과 불평과 항의를 듣는 치욕을 견뎌내어야 한다. 그 이유는 각자 대변자들을 가지기 원하며, 자기의 송사를 변호하기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총애를 의지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평화를 진작시켜나갈 때, 비록 사람들에게 우리의 노력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우리를 자녀라고 여기시는 그의 아버지의 심판만을 바라보라고 명하신다.  이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기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이 것임이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가르침이 크게 필요하다.  그리고 육신이 너무 힘들어 하고 싫어할수록 더 진지하게 우리는 이 주제를 묵상해야만 한다.  우리는 세상의 큰 부분이 증오로 우리를 대항하여 일어나고 우리를 죽음에 이르기까지 추격해 오는 데까지 이르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없다. 사탄은 세상의 왕자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대항하여 증오심을 가지도록 분노로 그 추종자들을 채우는 것을 결코 쉬지 않을 것이다. 의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합당하지 않는 방법으로 공격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게 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괴상하고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한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베드로전서 3:13)

그러나 세상의 고삐 풀린 악의 결과로 그러한 일이 자주 일어난다. 선한 사람들이 의를 위하여 열심을 내는 것을 통해서, 불경건한 자들의 진노가 그들을 향하여 일어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말하듯이, 보통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은 사람들 대다수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육신은 복음의 가르침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덕을 책망 받는 것을 아무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

이는 그들을 대항하여 악한 자들이 증오의 불을 붙이며, 진노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선하고 바른 일을 하는 진지한 욕망을 통해서 그들은 그들의 능력 가운데 있는 한에서, 나쁜 일들을 대적하며 선한 일들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진리는 첫 지위를 정당하게 가진다.  따라서, 이러한 표지로,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순교자들과 죄수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구별한다.

칼빈은 방금 말한 것에 다시 돌아간다. 곧 모든 경건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들은, 바울이 예고한 것처럼, “핍박을 받을 것이다.” (디모데후서 3:12).  이 경고는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주어진 일반적 언급이다.  그러나 만일, 어느 때나, 주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아끼셔서, 불의한 자들이 우리를 그들이 원하는 것만큼 괴롭히지 못하게 하신다면, 그러한 휴식과 여가 기간에, 우리는 이 가르침을 묵상하고 필요할 때 언제나 전투에 나갈 준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경건한 자의 형편은 그 생애 전체를 통해서 매우 비참함으로, 그리스도께서 합당하게 그들을 천국의 소망으로 불러 주신다. 여기 그리스도의 역설은, 각자는 그 마음에 만족해야 한다고 명하며 그의 행복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스토익들의 부르짖음과 전적으로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형체 없는 상상 위에 세워 놓지 않으시고 미래의 보상의 소망 위에 세월 놓으신다.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누가복음 6: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을 위로하려고 하셨다.  세상의 눈에 그들이 미워하는 자로, 그들이 자신들이 비췰 때도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교회 밖으로 불경건하고 세속적이라고 파문을 당하는 것은 결코 적지 않은 유혹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위선자들처럼 독이 가득한 자들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복음의 원수들이 분노가 가득한 광기를 가지고 자신의 적을 경멸하고 공격할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확실한 방비로 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큰 비방이 그들을 놀라게 할지라도 항복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이 그들의 회당에서 쫓아내었드이, 교황이 파문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 뜻은 구원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당한 비방에 의해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의 마음을 천국을 향하여 들면, 우리는 거기서 슬픔을 몰아낼 기쁨의 큰 근거를 바라보게 된다.

교황주의자들의 게으른 합리화는 “보상”에 있다. 그러나 보상과 공로와의 사이에 그들이 몽상하는 상호관계는 없다. 오히려 보상의 약속은 거저 주시는 것이다.  이 밖에도, 만약 최선의 사람들이 행한 어떤 선한 일들 속에서라도 불안전함과 잘못들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판단하셔서 보상을 받을 만한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 번 더 주의를 돌려서 두 구절을 살펴 보자.  나 때문에, 혹은 인자 때문에 (누가복음 6:22), 그리고 거짓말을 하며, 너를 대항하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자기의 잘못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은 (베드로전서 2:20) 그가 그리스도의 순교자라고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고대의 도나티스트들은 재판관들이 그들을 대적했을 때, 단순히 이 한 가지 근거로 그들 자신이 기뻐했다.  우리 시대에는 재침례파들이, 교회를 그들의 헛소리로 소란하게 하며 복음을 비방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깃발을 들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으나, 그들은 정의롭게 정죄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의를 위하여 부르심 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은 복되다라고 선포하신다. 

이 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사도들은 승리하기 위하여 노력과 경쟁을 겪어야 했고, 핍박을 당할 때 실패하지 않을 것을 확실히 약속해 주셨다. 모든 것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성경에 어디서나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어리석게 그리스도의 나라를 부와 사치로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경고하는데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선지자들의 위치로 성공하는 순간, 그들은 선지자들이 이전에 관여했던 같은 투쟁을 해야만 하였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 

이것은 그들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시간적으로 먼저 되어서 존경하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그들이 그들 자신과 같은 동류였음을 뜻한다.  그래서 그들의 본을 받아야 했다.

누가복음 6:24 부한 자들은 화가 있으리로다.  누가는 네 가지 축복을 말했다.  이제 그는 네가지 저주를 대조시킨다.  그래서 그 구절들은 서로 대응한다.  이 대조는 불경건한 자들에게 공포를 줄 뿐 아니라, 믿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의 속이는 헛되고 텅빈 유혹에 잠들지 않게 하려 함이다.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번영에 중독되는지, 아첨에 잘 넘어 가는지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주 타락한 자들이 모든 일에 번영하고 잘 나가는 것을 시기한다.

그는 부한 자들에게 저주를 발한다. 모든 부한 자들이 아니라, 세상에서 안위를 받고 장차 올 삶을 잊고 있는 부한 자들을 저주한다.  부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멀다.  부는 자주 그들을 파멸하는 도구가 된다.  다른 관점에서 볼 때, 부한 자들은 천국에서 소외되어 있지 않다.  만약 부가 그들을 유혹하게 허락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땅에 그들의 소망을 고정하면 천국은 그들에 대하여 닫힌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자세하게 증거한다.  그는 부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보여주면서, 그는 독자들에게 가난한 나사로가 부자 아브라함의 품에 영접되었음을 상기 시킨다.

25. 배부른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 지금 웃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

같은 맥락으로, 주께서는 배부르고 만족한 자들에게 저주를 발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현재 삶에 주신 복을 의지하여 교만하고 하늘의 축복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이 웃음에도 적용된다.  이는 웃는 자들이란 에피큐러스적인 쾌락을 좇는 육신의 즐거움에 빠진 자들을 가르키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갖가지 고난을 비웃기 때문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를 칭찬하면 저주가 있을찌어다.

마지막 저주는 야망을 고치려고 의도하는 교훈이다. 이는 인간의 칭찬을 구하는 것처럼 천한 것이 없기 때문이요, 이는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그런 길을 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주께서 사람의 칭찬은 그들의 파멸이라고 지적한다.  이 경고는 특별히 선생들을 가르치는데, 그들은 야망을 어떤 염병보다 더 싫어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갈라디아서 1:10) 하나님의 순전한 가르침을 부패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모든 사람들을 언급하셔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자녀들을 의미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칭찬은 속이는 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가르침을 가진 신실한 자들과 양심 있는 사역자들은 선한 사람들의 칭찬과 사랑을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악한 호의를 여기서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 주듯이 (갈라디아서 1:10),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152개(1/8페이지)
말씀설교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5월 1일 이후 맥체인 성경 읽기 및 칼빈 주석 번역 절제회 17814 2018.07.23 12:01
공지 1월 31일-4월 30일, 맥체인 성경 읽기 절제회 18094 2018.04.05 15:37
150 천로역정 절제회 2421 2019.07.26 14:10
149 산상수훈 8복 절제회 4208 2019.04.17 13:44
148 현대선교와 변증 1장 강해 : 오늘날 교회에게 주어진 변증적 과제 첨부파일 절제회 3098 2018.11.29 14:45
147 그 중에 제 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절제회 3361 2018.10.30 18:25
146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마태복음 16:20-28 절제회 3799 2018.07.30 12:31
145 이미 도래하였고, 부활의 몸을 입을 때 온전히 누리게 될 그리스도의 왕국 절제회 3877 2018.07.24 17:23
144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이사야 40:27-31 절제회 4041 2018.07.24 17:22
143 구원의 완전하심과 심판 (이사야 43장 18-21, 시편 103:17-1 절제회 3529 2018.07.24 17:14
142 장차 오실 메시아(신18), 하나님의 언약(시105), 천국에 입성한 성 절제회 3006 2018.07.24 12:15
141 벗은 몸과 발로 회개하자(이사야 20장) 칼빈 주석 절제회 4103 2018.07.24 12:08
140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을 형제, 자매, 어머니라고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 절제회 3340 2018.07.23 11:45
139 성찬(마태 26:26-30; 마가 14:22-26; 누가 22:17-20 절제회 3653 2018.07.23 11:42
138 열 처녀 비유(마태복음 25장) 칼빈의 주석 절제회 5689 2018.07.23 11:41
137 가장 큰 계명(마 22:34-39; 막 12:28-34; 눅 10:25- 절제회 4313 2018.07.23 11:40
136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다(마태복음 16:13-19 ;막 8:2 절제회 2911 2018.07.23 11:38
135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마태복음 15:21-28,막 7:24-30) 칼 절제회 5870 2018.07.23 11:37
134 회개의 부르심(마태 11: 28-30) 칼빈의 주석 절제회 4613 2018.07.23 11:35
1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이사야 59:20-21) 칼빈의 주석 절제회 3518 2018.07.23 11:33
132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태 6:31-3 절제회 3262 2018.07.23 11:31
>> 산상보훈 (마태복음 5: 1-12) 칼빈 주석 번역 절제회 5527 2018.07.23 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