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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바울 복음의 이해 / 절제회 성경강해

절제회 | 2015.12.29 17:18 | 조회 4111
바울 복음의 이해 / 절제회 성경강해

신약학박사 김정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13-14)

1. 서론

한국에 선교가 시작된지 벌써 116년째가 되는 21세기 첫 해에 한국교회와 선교 비교 연구를 통해서, 바울의 복음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교회로부터 온 세계로 향하여 5,000명에 달하는 선교사들이 21세기에 나갈 것으로 예측되고 있어 선교에 미칠 한국교회와 한국선교사들의 영향이 세계적으로 매우 클 것을 내다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선교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질문, 곧 선교사들이 전파하여야 할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우리는 물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우리는 바울은 예수님이 주신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갈라디아서 3:13-14 말씀을 분석함으로 우리가 전하여야 할 복음의 바른 이해에 도달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2. 본론.

1) 갈라디아서 3:13 주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 율법의 저주

갈라디아서 3:13에 나오는 "율법의 저주"란 말은 율법을 범한 우리 인류 모두에게 임하는 말씀이다. 곧 바울은 갈라디아서 3:10에서 신명기 27:26을 인용하여 율법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으려는 자는 모두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고 천명하였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 (갈 3:10 )

바울이 여기서 담대히 율법의 행위로 구원얻으려는 사람은 모두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세의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율법을 완전히 지키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아담 이후 타락된 성품으로 아무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율법이 선포한 저주는 모든 사람에게 임했는데 반하여, 율법이 약속하는 모든 축복에서는 모두가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 3:11-12에서 율법으로 아무도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고 오직 믿음만으로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 살리라 하였느니라." (합 2:4; 레 18:5; 롬 1:17)

율법은 그것을 완전히 지키는 사람을 의롭다 하나 믿음은 일의 공적이 없이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자들을 의롭다 하신다. 여기서 공적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과 은혜로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상치된다.

"율법이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은 그것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방법에서 믿음과 상반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믿음의 의가 무엇을 뜻하는 가를 로마서 10:9-10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 설명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은 믿음이 비활동적이거나, 믿는 자들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이 말씀의 논점은 믿는 자들이 얼마나 율법을 지킬 수 있는가가 아니고, 우리가 행위로써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는가인데, 물론 불가능하다. 율법의 완전한 준법자가 있다면 의롭다함을 받을 것인데, 아무도 그렇지 못하기에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고 바울은 선언한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되사"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심으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선포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태어나심은 율법 아래 갇힌 자들을 구속하시기 위함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갈 4:4). 그런데 고린도후서 5:21은 그리스도를 "죄를 알지도 못한 자"라고 묘사함으로써, 평생을 순종으로 지낸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명백히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Jerome은 죄없는 그리스도가 저주가 되셨다는 말은 성서적으로 모순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Luther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서 저주가 되셨다고 바울이 말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저주가 되셨다고 말함으로 이 말씀은 성서적으로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마태복음 8:17은 이사야 53:4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는 고난받는 종으로써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징계받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사야 53:5-6, 11-12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셨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구약의 예언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하늘의 위로가 넘치는 이 지식을 우리는 바르게 이해하고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 흔히 그리스도를 죄와 죄인들과 상관없는 자로써 우리가 무조건 흉내내어야할 본보기로 제시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심판자요, 독재자요, 우리의 죄를 인하여 화를 내며, 죄인들을 정죄하는 자로 잘못 증거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하여, 세례요한은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께서 두 강도사이에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심은, 모든 죄를 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심이이다.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었다. 바로 이 진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핵심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심은,
우리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21)

(3) 어떠한 모양으로 그리스도께서 저주가 되셨는가?

죄 없으신 예수는 그의 죽으시는 모양, 곧 나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저주받은 자로써 죽으신 것을 확실히 증거해 보여 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의미를 바울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음이라"고 갈라디아서 3:13 하반절에서 신명기 21:23b를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이것은 원래 처형당한 죄수의 시체를 방치하는데 대한 언급으로 신명기 21:22-23 원문은 아래와 같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함으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러므로, 요한복음 19:31-32에 의하면 유대지도자들은 예수와 그와 함께 못박힌 두 강도들의 시체들을 해지기 전에 십자가로부터 내려줄 것을 요구한다. 회심하기 전의 바울에게 있어서는 저주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하는 초대교회의 가르침이 참으로 불경스러운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그러나,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죽음에서 일어나시어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을 깨달았다. 그 때 비로소, 바울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지신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 지식은 우리에게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것이 오류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영원전부터 하나님이 예비하신 속죄양이 되시고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심으로 나무에 달리셨다면, 행위로써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4)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엑사고라조)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표현했을 때, 그는 "엑사고라조"라는 동사를 써서, 이 놀라운 구속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 동사는 갈라디아서 4:4-5에서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묘사하는데 쓰인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접두어 "엑"없이 단순동사 "아고라조"는 고린도전서 6:19-20; 7:23에 나오는데 일부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고린도전서 (7:23)

위의 두 인용문들 속에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는 뜻으로 쓰인 이 동사는, 그 당시 사회에서 종들을 돈을 주고 사서 자유를 주는데 일상적으로 사용된 단어였다. 갈라디아서 3:13; 4:5에서 "엑"이라는 강조접두사와 함께 쓰였다. 그리하여 구속하는 행동 그 자체를 더욱 두드러지게 묘사하며, 결과로 주어진 자유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종을 해방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 동사로, 바울은 율법의 저주 아래 노예된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라는 최악의 고통을 당하신 것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에서, "우리"는 누구를 가르키는가? 바울의 복음이 유대인신자들만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받았다고 하는 뜻을 전적으로 배제하하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3:13에서 "우리"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가르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2) 갈라디아서 3:14 분석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14절에는 두 개의 목적절이 희랍어 접속사 "히나"로 시작되어 각각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으심의 목적을 표현한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방인에게 미치는데 대해서 일반적으로 언급하고, 두 번째는 성령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는데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1)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죄와 저주, 죽음이 멸망당하고, 축복과 의, 그리고 생명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만물이 새롭게 된 것, 바로 그리스도 예수 한 분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진실을 요약하는 문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르 바라보면, 그 안에서 죄와 죽음, 지옥, 마귀, 모든 악이 멸망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한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의 가슴 속에서, 그의 은혜로 다스리시는 한 죄와 죽음 저주는 없다. 반면,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않는 자들은 이 측량할 수 없는 축복과 영광스러운 승리를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요한 1서 5:4에서,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라고 한다.

(2) "아브라함의 축복"

여기서, "아브라함의 축복"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으로써 아브라함과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율법은 율법이 주어진 이스라엘 백성과 그것이 주어지지 않은 이방인들을 구분하고 있으나,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명백하게 그 대상 안에 이방인들, "판타 타 에스네"를 포함시키고 있다.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게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 12:1-3; 비교. 창 18:18; 22:18; 26:4; 28:14).

이방인들도 한 몫을 가지도록 허락된 이 축복은 그리스도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사 저주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심으로 이루어졌다. 바울은 모든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씨 안에서 축복받을 것이라는 창 22:18 (참조. 창 13:15;17:7)의 약속에서 언급된 그 "씨"는 그리스도를 가르키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3) 성령의 선물

그렇다면, 어떠한 모양으로 "아브라함의 축복"이 믿는 이방인들에게 임하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 번째, "히나"접속사로 시작되는 목적절에서 나온다.

"또 우리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믿는 자에게 "약속"된 축복은 성령의 선물이다. 이미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그가 부활하시고 영광받으신 후에 주실 가장 귀한 선물로써 성령을 약속하고 계신다.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렇게 귀한 성령의 선물을 우리는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매우 중요하다. 갈라디아서 3:2에서와 같이 갈 3:14에서 바울은 성령을 받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강조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고, 축복의 약속을 받았듯이, 이제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모든 역사를 이루신 것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하시고 약속된 축복--성령의 선물을 받게 하신다.
여기서 "성령의 선물"이라는 구절은 히브리식 표현으로 "약속하신 성령"이라는 뜻인데, 성령은 율법, 죄, 죽음, 저주, 지옥,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자유를 주신다. 성령께서는 성도들 안에 내재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증거하시고 (롬 8:1-4), 부활을 약속하시고 (롬 8:9-11), 죄와 싸우게 하사 성결하게 하시며 (롬 8:5-8, 12-13), 성도들에게 하나님 자녀됨을 증거하시고 (롬 8:15-17), 성도들의 약함가운데 친히 중보하신다 (롬 8:26-27). 우리의 공적이나 가치는 성령의 사역과 전혀 상관없기 때문에 바울은 성령의 선물을 설명하면서, 명백히 "우리가 성령의 약속을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다"라고 강조한다.
3. 결론

1) 갈라디아서 3:13-14과 바울복음

(1) 믿음의 의에 대한 증거

갈라디아서 3:13-14은 율법의 행위가 없는 가장 악하고 비천한 죄인인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자비와 사랑을 말함으로 죄인된 우리에게 완전한 위로를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높이고 율법과 행위의 의를 좇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인해 죄가 되심으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구속함을 받았으니, 결코 우리의 일이나 공적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우리의 죄를 지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우리 죄를 져야하는데 이는 곧 우리가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구원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고전 15:57)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죄는 강한 힘이 있어 배운 자나 무식한 자나, 거룩한 자나 지혜로운 자나 다 삼켰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죄는 단번에 멸망당하고 정복당하고 하나님의 의가 이기고 승리하여 영원히 다스리게 된 것이다. 죄의 권세로 인해서 강한 힘을 과시했던 죽음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정복당하고 물리침을 받았다. 이제 죽음은 그림 속에 있는 허상일뿐, 그 독침을 잃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더 이상 해칠 수 없다. 그래서 호세아선지자는 말한다.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호 13: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자비로써, 죄와 죽음, 저주를 이기신 것을 바울은 골로새서 2:1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3:13-14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현대 일부 신학자들이 4세기에 Arius가 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때, 그들은 구속에 대한 믿음과 함께 부인해야 했다. 세상의 죄, 죽음, 저주, 하나님의 진노를 그 몸으로써 극복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피조물된 인간의 일이 아니라 신성한 하나님의 능력에 속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몸으로 죄를 멸하시고, 죽음을 파괴하시며, 저주를 없애셨다. 또한 그가 생명과 의, 축복을 소유하고 계신다함은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심을 가르친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는 기독교를 다 잃어 버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이 도리를 잘 알아야 한다. 이는 이 한 도리를 잘 파악하면 그 외의 복음의 모든 것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 갈라디아서 3:13-14의 역사적 의미

중세교회는 고행과 순례, 미사와 서원을 통한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의에 이른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바울 당시 갈라디아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적 가르침과 같이 이러한 가르침은 오히려 모든 인간을 율법의 저주 아래 묶어 버렸다. 왜냐하면, 죄를 멸하고 죽음을 파하고 의를 창조하며 생명을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중세교회는 이러한 일을 인간의 행위에 돌리고서 이 일, 혹은 저 일을 하면 죄와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 인간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 놓고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극심한 우상숭배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고, 우리의 죄를 지고 가셨다는 바울의 이 위로가 충만한 가르침은 루터로 하여금 철저히 믿음만으로 의에 이름을 보여주고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모든 노력을 배격하게 했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이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하셨다는 바울의 복음을 재발견함으로 중세의 모든 거짓 가르침을 무너뜨렸다.

(3) 믿는 자가 받는 축복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저주가 되어 주셨는데, 그는 영원하신 신이심으로 죽음이 그를 붙들어 둘 수가 없어서, 그는 사흘 후에 죽음에서 일어나셨고, 이제 영원히 살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죄도, 죽음도, 더 이상 없고, 오직 의와 생명, 영원한 축복만이 있다. 이제 우리는 이같이 아름다운 복음의 내용을 항상 기억하고, 믿음의 눈으로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아무리 무서운 죄인일지라도 그리스도의 결백하심과 승리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만으로인데, 이는 믿음만이 그리스도의 죄없으심과 승리를 붙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죄와 죽음, 저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파멸당했다고 믿기만 하면, 우리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이기시고, 없이 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그에게서도, 죄와 죽음을 없애 주신다.
루터는 외친다. 죄와 죽음이 당신을 떨게 하거든, 이것은 단지 환상이요, 마귀의 거짓된 허상에 불과함을 기억하라고... 진실로 죄와 저주, 죽음과 마귀가 더 이상 믿는 자를 해롭힐 수 없음을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다 정복하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가장 확실한 것이며, 복음의 진리는 가장 견고한 것인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 좋은 것들을 깨달을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이해가 가능하다 (고전 2:10-16). 사단은 불화살과 갖은 거짓 가르침으로 지금도 이 진리를 믿지 못하게 하려고 열심히 다닌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믿고 가르치는 자는 이 세상과 사단에게 미움과 잔혹한 핍박을 받게 된다.
(4) 갈라디아서 3:13-14과 교회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없다는 부활신앙은 "우리는 하나의 교회를 믿는다"라는 사도신경의 고백에 나타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죄도, 죽음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기에 죽음이 없고,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물론 믿음으로만 이 거룩한 교회를 볼 수 있고, 우리 눈으로는 우리 자신에게서나 우리 형제에게서 거룩함은 전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교회를 성결케 하시고 정결케 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교회의 거룩함을 밝히 볼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죄를 지고 가셨기 때문이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 세상의 죄를 그리스도께 다 담당시키사 단번에 멸하셨기 때문이다 (사 53:6; 롬 8:3).
그리스도는 한 번 죄를 위해 죽으셨으나 이제 부활하셔서 더 이상 죽지 않으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한 참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죄는 멸절 당하고, 죽고, 묻히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죄가 여전히 남아 있다.
비록 죄의 잔제가 성도들이 완전히 믿지 못함으로 그들에게 아직도 있을지라도 죄는 이미 그들에게 죽은 것이니, 이는 그들이 더 이상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 때문에 죄의 송사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의 복음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우리가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분을 믿는 믿음으로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5) 율법과 바울의 복음

누가 감히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는 모세의 말을 그리스도와 결부시킬 수 있었겠는가? 바울은 진정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 적용시킬뿐더러, 모든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다"는 말 한 마디 안에 이해하고 있다. 바울의 복음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저주가 되셔서 모든 열방으로 축복받게 하셨다는 것을 듣고 믿는데 있다.
모든 죄악이 우리를 위압하려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율법의 범법자로 여긴바 되시어, 우리의 모든 죄와 악을 대신 지심으로, 사악하고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용서하신 복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는 영원히 우리를 괴롭힐 모든 죄악을 대신 담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그가 당할 고난을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시편 88:7; 참조: 시편 88:1-8).

바울은 그의 사도직을 바르게 감당하는 자로써 갈라디아서 3:13-14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도리와 율법의 관계를 구약 속에서 부지런히 찾아 가르치고 있다.


2) 갈라디아서 3:13-114에 나타난 바울의 복음이해와 구약의 언약들

많은 선지자들과 왕들이 보기를 고대했던 아름답고 신실한 이 복음이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이루어졌다. 선지자들은 오래 전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들이 한 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고쳐지고 다스린바 될 것을 내다 보았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든 유대인들과 함께 그리스도 (히브리어로 메시야)를 기다렷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신 18:15)

이스라엘 조상들은 모세가 가르친 법이 위대함을 잘 알았다. 십계명은 특히 그 첫째 계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가르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2)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하나님 사랑에 대한 이 율법은 모든 신령한 지혜의 근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생님이 와서 율법을 훨씬 뛰어 넘는 다른 것을 가르칠 것을 고대했는데, 그것이 바로 은혜와 죄의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갈라디아서 3:13-14 본문이 위대한 것은 바로 그 짧은 문장 속에서 바울은 복음의 모든 것을 담아 놓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3:13-14에서 바울은 구약에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진 것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세우신 축복의 언약을 이루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죄인을 위해 죽으심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발하는 모든 저주가 응하여, 모세와 세우신 하나님의 율법의 언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다윗과 세우신 언약, 곧 기름부음받은 자, 메시야를 보내셔서 그 백성을 성령으로 다스리리라고 약속하신 축복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보내사 이루어졌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새 언약의 약속이 있었는데, 이는 더 이상 그 백성의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마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저주가 되사 나무에 달리심으로 모든 죄로 말미암은 저주를 단번에 지셨을 때, 죄의 권세는 영원히 멸망당하고,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역사할 수 없게 됨으로, 하나님께서는 새언약에서 약속하신 영원한 용서에 대한 그의 약속을 이루셨다 (예 31:31-33).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기 전날밤, 떡을 떼시고, 그의 피로서 세우신 새 언약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언약의 완성이며, 또 이 모든 언약을 뛰어넘는 것으로서, 영원히 폐기될 수 없는 완전한 평화와 용서의 언약이다 (겔 37:26; 사 54:10; 마태 26:28; 막 14:24; 요한 6:53-058). 바로 이 새언약의 중보로써, 모든 언약의 완성자로써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것을 갈라디아서 3:13-14에서 바울은 증거하고 있다. 초대교회에서 바울이 모든 핍박가운데 전했던 이 복음이 우리가 선교를 통해 전할 복음임을 기억하자. 우리도 이 복음을 통해 모든 족속을 그리스도의 제자삼는 일을 완수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참고문헌:

F.F. Bruce, Commentary on Galatians. Grand Rapids: Eerdmans, 1984.

F. Buechsel. "Agorazo", TDNT (1983) 124-128.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Galatians. Grand Rapids: Baker, 1984.

Martin Luther, A Commentary on Saint Paul's Epistle to the Galatians. Grand Rapids: Baker, 1969.

김 정주, 바울의 성령이해. 서울: 기독교서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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