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출처 : http://www.yes24.com/Product/Goods/6212279?scode=032&OzSrank=3
책소개
6.25 전쟁이 발발한지 어언 69년
이 책은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 RHEE) 여사가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부터 중공군 개입으로 유엔군이 37도선으로 철수한 1951년 2월 15일까지의 상황을 기록한 일기다. (CONFIDENTIAL NOTES 또는 MRS RHEE DIARY) 6.25 전쟁 69주년을 맞아 재출간 하였다. 6.25 전쟁에서 가장 혼란스럽고(부산 피난, 1.4후퇴), 가장 어렵고(서울 철수, 낙동강 방어),가장 극적인(인천상륙작전, 중공군 개입) 사건을 통치자의 바로 옆에서 관찰하고 다룬 매우 소중한 자료다. 능히 이승만대통령의 ‘전시통치사료’로 읽힐 만하다.
거기에 더하여 고위층의 아들들이 병역을 기피하고, 권력층과 부유층이 앞 다퉈 일본행 여권을 신청한다는 당시의 사회상도 담담하게 전해 준다. 그렇게 해외로 도피했던 지도층의 자제들이 유명한 화가도 되고 건축가도 되어 돌아왔구나,라는 착잡한 생각이 들게 하는 기록이다. 입으로는 반미를 외치며 자기 자식들은 하나같이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있는 현재 좌파 정치인들의 행태도 돌아보게 만든다.
북한이 남침한지 127일 만에 탈환한 적의 수도 평양에서 이승만
이 행한 연설도 흥미롭다. 우리는 한 형제요 한 핏줄이라는 강한 민족의식을 표출했는데, 이는 현재 한국 좌파 세력의 민족지상주의와도 맥이 닿아 있어, 좌파들의 이승만 지우기가 의아해지는 대목이다. 오히려 그것은 민족주의를 전체주의와 동일시하는 현 자유 우파들의 사상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저자소개
저자 : 프란체스카 도너 리
1900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교외에서 태어나 비엔나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 영어 통역사와 타자 및 속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1933년 어머니와 유럽을 여행하던 중 제네바에서 이승만 박사를 만나 이듬해 뉴욕에서 결혼했다. 1946년 이 박사와 함께 귀국하여 돈암장에서 거주하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1948년부터 경무대로 옮겼다. 1960년부터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남편의 병간호를 하며 망명의 나날을 지냈으며, 이 박사 서거 후 비엔나로 돌아갔다. 1970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 이화장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2년 타계하여 동작동 국립묘지 이승만 전 대통령 곁으로 모셔졌다.
역자 : 조혜자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196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와 결혼했다.
목차
머리말을 대신하여
제1부기습남침과 대통령의 초기 대응
대통령의 서울 사수 의지
배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
‘자유중국’의 파병제의 거절
빨갱이 세상으로 바뀐 서울
기동순찰 오토바이 따돌린 운전 솜씨
카투사 제도의 시작
채병덕 장군의 전사
“죽창으로 적을 막겠다!”
꼬마들과의 팔씨름
제2부낙동강 방어선에서 대통령의 역할
친정에서 보내온 격려편지
겨우 구해 발라보지도 못한 땀띠약
실종자 속출하는 미 24사단
“꿈속에서 대통령이 나를 쏘았다!”
오랜만에 진해에서 단잠을 자다
부산 수도 기습발표
군악대 환영받은 경무대 요리사
낚시 즐기다 경비병에 쫓겨나
종군 미국 여기자와 인터뷰
낙동강 저지선 붕괴
밤새 쓴 37통의 편지
고당(古堂)이 있었더라면......
병역기피 꾀하는 고위층 아들들
한심한 국회의원들
인천상륙작전
제3부서울 수복과 대통령의 북진통일 행보
헬렌 킴의 신발에서 튀어나온 개구리
“국군이 먼저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하라!”
이제는 마음 놓고 추수하게 됐어!
우리나라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
돌아온 애견 ‘해피’
제네바에서 만난 ‘동양 신사’
백선엽, 인엽 형제
장미 한 송이로 결혼기념일 선물
쑥밭이 된 이화장
술 즐기는 시인 김 비서
“나는 통일의 광신자이다!”
평양 입성으로 축제 분위기
소설가 친구 구하러 가겠다는 시인 비서
미국을 불신하는 북 주민들
장작 패며 울화를 달래다
미군 허가 받으라는 대통령의 원산 시찰
평양시민의 열렬한 환영받은 대통령
끊어진 한강철교 재개통
6년 만에 이어진 서울과 평양 전화
대통령의 자주독립노선 헐뜯는 미국
판치는 가짜 경찰, 가짜 군인
압록강 얼어붙자 중공군 인해전술
중공군에 원폭투하 검토
“무기가 없으면 낫이라도 들겠다!”
제4부1? 4후퇴와 대통령의 고군분투
맥아더의 기자회견에 실망
“다시는 서울 떠나지 않겠다!”
파면설 나도는 맥아더
각료들 훈계한 대통령
미8군의 제주도 피난계획
한국 적화되면 일본과 필리핀도 위험
미국, 원화 평가절하 압력
골치 아픈 외국기자들
“리지웨이 사령관 임명은 맥아더 견제용”
소꿉친구의 간청마저 거절한 대통령
맨손 대통령에 달군 조약돌 선물
평양 사과는 손님 접대용
경무대 뒤뜰에 놓인 장독대
생선은 머리 부분, 소는 꼬리 부분
천국행 티켓 품고 서울 사수 결심
중공군 인해전술 막을 원자탄
남행 비행기는 타기 싫다
대통령의 자작시 ‘빈대’
경무대 후송차량에도 피난민
국난 때는 부녀들이 맹활약
온 국민에 항전 독려
권력층과 부유층의 일본행 신청 러시
한국은 아시아의 열쇠다!
여성단체 궐기대회
“50만 명분 무기 달라!”
여섯 살에 천자문 뗀 대통령
전선에서 자취 감추는 중공군
14살에 죽은 외아들
제5부통일 향한 대통령의 집념과 열정
빨리 38선을 넘어라
양말, 내의 꾸려 장병들에게
양력설 쇠기 캠페인
미주리함에 올라 감회에 젖은 대통령
대통령 별명은 ‘통일병 환자’
직선제 헌법 개정과 통일 성취
북진 제동에 격노한 대통령
‘국난 극복일’ 제정 건의
연보
출판사 리뷰
전쟁을 하고 있는 고국에서 도망치는 특권층 그리고 장면 총리
1950년 9월 8일
한 명의 젊은이, 한 자루의 총이 아쉬운 때다. 그런데 사회 일각에서는 “힘 있고 빽 있는 사람의 자식들은 요리조리 군대를 기피하고 해외로 빠져 나간다”는 비난의 소리가 들린다.
장면(張勉) 당시 주미 대사가 무초 주한 미 대사에게 부탁해 두 아들의 미국 유학 비자를 마련해 주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대통령도 무초 대사로부터 한국정부의 요인들이 자기 아들들의 유학 비자를 부탁해 와서 골치가 아프다는 불평 비슷한 소리를 듣고 몹시 괴로워했다. 대통령은 “이럴 때 우리에게 아들이 있어 군에 입대시켜 직접 모범을 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한탄했다.
1951년 1월 11일
무초 대사가 와서 장면 총리가 귀국하도록 빨리 전보를 보내라고 대통령에게 재촉했다. (1950년 11월 23일에 총리로 임명된 장면은 49일이 지난 이때까지 귀국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일단 미국에 나가면 귀국하려 들지 않았다. 국내가 긴박한 상황 아래서는 그곳이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일반 국민들은 나라를 구하려고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데, 외무부에는 일본행 여권 신청자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정부는 일본으로 밀항하여 해외도피를 꾀하는 자들을 엄중 처벌할 것이며, 제주도 피난도 금지한다고 발표 했다. 해외 여권 신청자들은 대부분 권력층과 부유층 인사들이다. 물론 그럴듯한 여행 이유를 만들어온다. 하지만 외무부에서는 공무 이외의 해외여행은 일체 허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더욱 굳히고 있었다.
2월 2일
드디어 장면씨가 총리직을 수락했다. 신 국방은 장 박사가 총리직을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고 말했다. 만일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 박사가 한국체류를 두려워한다고 헐뜯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쟁 한 가운데에서의 정쟁
1950년 9월 9일
상황은 아주 위급하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소서. 대구와 경주를 포기할 수는 없다. 미군은 도대체 얼마나 더 있어야 반격준비가 된단 말인가?
오전 11시, 대통령은 국회에 나가 한 시간 넘게 연설 했다. 내무, 국방장관 해임권고 결의안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야당 의원들은 구속된 의원의 석방을 요구하며, 이것이 헌법상에 명기된 권리이므로,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탄핵위원회의 구성도 고려하겠다고 했다.
화가 난 대통령이 다시 등단해서 반박했다. “헌법에 보장된 행동이라도 위기에 빠진 나라에 해가 되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 무엇보다 국가가 최우선이다. 나라와 땅이 회복되지 않으면 헌법도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 이런 논쟁은 지금 치르고 있는 치열한 전쟁이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나라와 땅이 원상 복구된 다음에 무슨 일이든 해도 좋다.”
국회가 폐회되자 신익희 의장이 와서 대통령에게 총리 자리를 달라고 요구했고, 장택상 의원은 내무나 국방장관 자리를 달라고 했다. 이 두 사람의 요구가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인천상륙 작전
1950년 9월 13일 태풍
대통령은 미국인들에게 추수기 이전에 공격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재촉했다. 피난민들에게 추수기가 지난 후 빈 들과 부서진 집으로 돌아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으냐, 라는 이유에서였다. 추수를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다면 전쟁의 반은 이기고 들어가는 셈이다.
맥아더 장군은 마침내 이 같은 우리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힘을 다했다.
9월 16일
어제 하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에 성공했다고 한다. 공식발표나 보고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SCAP(연합국 최고사령부) 방송을 들어서 알 뿐이다. 인천 작전은 해군과 해병대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워커 장군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 비행기로 지원 폭격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좀 이상하지만, 그게 미 육군과 해군이 이곳에서 작전하는 방식이다.
이쪽 전선에서도 전투는 아직 한창이다. 마산 쪽만 비교적 덜한 편이다. 적군의 일부는 지리산 쪽으로 도주하고 있다. 산속에 숨으려는 속셈인 듯하다. 당초 우리 쪽 계획은 적군을 몰아친 뒤 그들이 어디서 재집결하는지 계속 확인하면서 추적 궤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날씨 탓으로 시계가 극히 제한돼 비행기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9월 27일
저녁 늦게 신 국방장관이 우리 해병대가 중앙청에 먼저 진입해서 태극기를 게양하여 서울 시민들이 환호성을 올렸다고 보고해 왔다. 대통령은 그 공을 높이 치하하면서 한편으론 만심(慢心)이 가장 큰 적이라는 새로운 각오를 하라고 신 국방에게 말했다.
대통령은 누구에게나 38선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며, 우리나라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것을 늘 강조해 왔다. 정일권 장군도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38선 이북까지 진격하여 공산당을 몰아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워커 장군은 좀 달랐다. 우리 국군을 찬양하는 성명도 발표했지만, 38선은 연합국의 결정에 의한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단 한 발짝도 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미 정 장군에게 한국군의 북진명령을 내린 후였다. 국군은 자기 나라 영토에서 자기 국가원수의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음은 물론이다.
하루 만에 거행된 맥아더 장군 훈장 수여식 그리고 환도식
1950년 9월 29일
오전 8시,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난 비행기가 한 시간 반쯤 비행했을 때 인천 앞바다가 보였다. 전함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대통령은 시종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시의 여러 군데가 파괴된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건물들은 앙상하게 파괴되었고 여기저기 포탄에 맞은 자취가 드러났다.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나는 뒤에 타고 있는 황비서에게 맥아더 장군에게 수여할 훈장을 확인시켰다.
김포 비행장에 도착하니 많은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눈에 익은 몇몇 특파원과 기자들이 대통령의 서울 복귀를 취재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 곁에는 워커 장군, 아몬드 장군, 조이 장군 등이 서 있었다. 대통령은 비행기트랩에서 내려 맥아더 장군과 악수를 나누며 감격적으로 껴안았다. 그 순간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어 대통령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동양인을 제대로 이해하여 존경하는 겸허하고 솔직한 인품의 소유자이다. 대통령은 그를 무척 좋아했다. 공적으로 자기 나라의 이익에 관계되는 일에서는 둘 모두 강한 성격을 드러내고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었지만 사적으로는 언제나 격의 없이 심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며 서로를 위하고 아껴주었다.
뽀얗게 이는 먼지 길을 뚫고 달리자 멀리 한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 얼마나 한 맺힌 눈물을 흘려보낸 강이었는가. 강물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고, 한강을 바라보는 대통령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리는 폭격으로 모두 부서져있었다. 차는 한강을 건너 강둑을 올라가서 마포를 지나 서대문 쪽으로 달렸다. 서울 시가는 무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도로변에는 영양실조로 수척해진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부르고 손을 흔들어 환영해 주었다. 대통령도 나도 감격하여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시가지로 들어설수록 공산군들의 살육과 방화와 파괴의 흔적이 더 심하게 드러났다. 중앙청 역시 검게 그을고 유리창은 모두 박살이 났으며, 아직도 매연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멀리서는 여전히 포성과 총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중앙청 현관을 지나 중앙홀로 들어갔다. 아직도 연기 냄새가 사방에서 났다. 구리로 된 둥근 돔은 찌그러져 있었고, 가끔 천장에서는 작은 유리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식이 거행되는 동안에도 계속 달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유리파편이 떨어져내려 신경이 곤두섰다. 기적적으로 다친 사람은 없었다.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맥아더 장군은 수도 서울의 기능과 권한을 한국정부에 돌려준다는 요지의 연설을 감격어린 어조로 말했다. 대통령도 이에 감동하여 연합군의 노고에 감사하고 전사한 유가족에 위로를 보내며, 승리자로서 적에 관용을 보이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비범한 군복무의 기나긴 생애를 통하여 장군이 이룩한 모든 업적 가운데 가장 훌륭한 업적으로서 역사는 국제연합군을 이끌어온 장군의 통솔력을 기록에 남길 것으로 본인은 확신합니다”라고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찬양했다.
악대도 의장대도 없었지만 참으로 감격적이고 의미 있는 환도식이었다.
식이 끝난 후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에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지체 없이 북진해야 하오. 그들은 군을 재편성할 시간이 없을 것이고, 저항할 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국제연합이 38선을 넘도록 자기에게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대의사를 표했다. 대통령은 장군에게 “국제연합이 이 문제를 결정할 때 까지 장군은 휘하부대를 데리고 기다려야겠지만, 한국군이 밀고 올라가는 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아니오? 여기는 그들의 나라요. 장군이 우리 군대에 공중지원을 한다면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요. 내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우리 국군은 북진할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오후 2시 대구.
대통령은 다시 대구로 내려가 육군본부에 들러 정일권 참모총장과 참모 장군들(강문봉, 양국진, 황헌친, 최경록, 김형일)에게 38선의 존재 여부를 물었다. 이들도 이미 38선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다고 답변했다. 대통령은 기뻐하면서 정 참모총장에게 국군의 북진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7월 14일 맥아더 장군에게 편의상 넘겨주었던 우리의 작전권은 우리가 필요할 때 언제고 대통령의 권한으로 회수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했다. 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대통령은 정 장군에게 평양은 우리 국군이 먼저 입성할 것과,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지대를 유엔군에 앞서 진격하여 확보할 것을 지시했다.
서울로 올라와 늦은 군용 점심을 들고 난 뒤 우리는 경무대로 향했다. 우리보다 먼저 올라온 경호원과 경무대 직원들이 아직도 정리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이선영 경사가 제일 먼저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남일(南日, 당시 북한 육군사령관)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고급 양복 윗저고리가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양말이 널려 있었다. 너무 황급히 도망치느라 남일은 양복도 버려두고 양말도 제대로 못 신은 채 떠난 모양이었다.
남일과 공산당 고위 관리들이 마시다 남겨둔 채 버리고 간 소련제 양주도 상자 안에 가득 있었다. 나는 이 전리품을 여기저기 승전선물로 보냈다. 무초 대사에게 보드카 2병과 백포도주인 부르뉴 2병을 선사했고, 노블과 워커 장군에게도 몇 병을 보내주었다.
이승만의 평양 연설과 민족주의
1950년 10월 30일
대통령은 오전 7시 반 경무대를 출발하여 8시 35분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평양으로 향했다. 바로 열흘 전까지 평양은 우리의 적인 공산당들의 아성이었기 때문에 나는 대통령의 안위가 몹시 염려되었다. 그러나 태극기를 든 평양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열렬히 환영했다. 연설을 마친 대통령이 군중 속으로 들어가 수많은 시민들과 악수하며 껴안고 등을 두드리는 바람에 수행했던 사람들과 정일권 장군이 무척 애쓰고 혼이 난 모양이었다. 신 국방장관은 물론 항상 느긋한 김광섭 비서도 대통령의 뜻하지 않은 행동에 어찌나 놀랐던지 목숨이 10년 이상 단축되었다고 말했다. 시청 발코니에 올라선 대통령에게 환영식장에 운집한 군중들은 눈물을 흘리며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감격한 대통령은 긴 연설을 했고, 시민들은 뜨겁게 박수를 쳤다. 평양시민 환영대회에서 대통령이 연설했던 내용을 김광섭(金珖燮, 시인) 비서가 적어서 가져왔다.
“우리는 단군의 후손으로 모두 형제요, 한 핏줄이니 다시는 서로 헤어지지 말자. 한 덩어리로 굳게 뭉쳐서 공산당을 몰아내고 기어이 남북통일을 완수하여 삼천리강토에서 영원무궁토록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힘을 합해 살아가자. (...) 우리는 피를 흘리며 싸워서 자유 독립국을 세운 것이니 어떤 나라든 들어와서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는 못할 것이며, 또한 우리가 간섭받을 이유도 없고 받지도 않은 것이다. 남북동포가 오직 한 덩어리가 되어 통일된 민족의 기상과 의지로 내 나라를 만들어 새 생활을 하자. (...) 과거의 잘못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자. 이제는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고 또 뭉쳐서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4천년을 이어 내려온 한 혈족으로서 아무리 어렵고 가난해도 있는 것은 서로 나누어 쓰고 나누어 먹으며 서로 돕고 양보하여 하나로 굳게 뭉치자.”
모든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대통령은 오후 1시 35분 여의도 비행장에 안착했다. 가슴에 넘치는 기쁨과 감격을 감추지 못해 순진한 소년처럼 흥분해 있던 대통령은 경무대 식구들에게 이제 남북동포가 한데 모여 잘 살 수 있는 통일의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50년 9월 8일
한 명의 젊은이, 한 자루의 총이 아쉬운 때다. 그런데 사회 일각에서는 “힘 있고 빽 있는 사람의 자식들은 요리조리 군대를 기피하고 해외로 빠져 나간다”는 비난의 소리가 들린다.
장면(張勉) 당시 주미 대사가 무초 주한 미 대사에게 부탁해 두 아들의 미국 유학 비자를 마련해 주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대통령도 무초 대사로부터 한국정부의 요인들이 자기 아들들의 유학 비자를 부탁해 와서 골치가 아프다는 불평 비슷한 소리를 듣고 몹시 괴로워했다. 대통령은 “이럴 때 우리에게 아들이 있어 군에 입대시켜 직접 모범을 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한탄했다.
1951년 1월 11일
무초 대사가 와서 장면 총리가 귀국하도록 빨리 전보를 보내라고 대통령에게 재촉했다. (1950년 11월 23일에 총리로 임명된 장면은 49일이 지난 이때까지 귀국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일단 미국에 나가면 귀국하려 들지 않았다. 국내가 긴박한 상황 아래서는 그곳이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일반 국민들은 나라를 구하려고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데, 외무부에는 일본행 여권 신청자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정부는 일본으로 밀항하여 해외도피를 꾀하는 자들을 엄중 처벌할 것이며, 제주도 피난도 금지한다고 발표 했다. 해외 여권 신청자들은 대부분 권력층과 부유층 인사들이다. 물론 그럴듯한 여행 이유를 만들어온다. 하지만 외무부에서는 공무 이외의 해외여행은 일체 허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더욱 굳히고 있었다.
2월 2일
드디어 장면씨가 총리직을 수락했다. 신 국방은 장 박사가 총리직을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고 말했다. 만일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 박사가 한국체류를 두려워한다고 헐뜯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쟁 한 가운데에서의 정쟁
1950년 9월 9일
상황은 아주 위급하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소서. 대구와 경주를 포기할 수는 없다. 미군은 도대체 얼마나 더 있어야 반격준비가 된단 말인가?
오전 11시, 대통령은 국회에 나가 한 시간 넘게 연설 했다. 내무, 국방장관 해임권고 결의안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야당 의원들은 구속된 의원의 석방을 요구하며, 이것이 헌법상에 명기된 권리이므로,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탄핵위원회의 구성도 고려하겠다고 했다.
화가 난 대통령이 다시 등단해서 반박했다. “헌법에 보장된 행동이라도 위기에 빠진 나라에 해가 되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 무엇보다 국가가 최우선이다. 나라와 땅이 회복되지 않으면 헌법도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 이런 논쟁은 지금 치르고 있는 치열한 전쟁이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나라와 땅이 원상 복구된 다음에 무슨 일이든 해도 좋다.”
국회가 폐회되자 신익희 의장이 와서 대통령에게 총리 자리를 달라고 요구했고, 장택상 의원은 내무나 국방장관 자리를 달라고 했다. 이 두 사람의 요구가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인천상륙 작전
1950년 9월 13일 태풍
대통령은 미국인들에게 추수기 이전에 공격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재촉했다. 피난민들에게 추수기가 지난 후 빈 들과 부서진 집으로 돌아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으냐, 라는 이유에서였다. 추수를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다면 전쟁의 반은 이기고 들어가는 셈이다.
맥아더 장군은 마침내 이 같은 우리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힘을 다했다.
9월 16일
어제 하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에 성공했다고 한다. 공식발표나 보고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SCAP(연합국 최고사령부) 방송을 들어서 알 뿐이다. 인천 작전은 해군과 해병대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워커 장군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 비행기로 지원 폭격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좀 이상하지만, 그게 미 육군과 해군이 이곳에서 작전하는 방식이다.
이쪽 전선에서도 전투는 아직 한창이다. 마산 쪽만 비교적 덜한 편이다. 적군의 일부는 지리산 쪽으로 도주하고 있다. 산속에 숨으려는 속셈인 듯하다. 당초 우리 쪽 계획은 적군을 몰아친 뒤 그들이 어디서 재집결하는지 계속 확인하면서 추적 궤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날씨 탓으로 시계가 극히 제한돼 비행기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9월 27일
저녁 늦게 신 국방장관이 우리 해병대가 중앙청에 먼저 진입해서 태극기를 게양하여 서울 시민들이 환호성을 올렸다고 보고해 왔다. 대통령은 그 공을 높이 치하하면서 한편으론 만심(慢心)이 가장 큰 적이라는 새로운 각오를 하라고 신 국방에게 말했다.
대통령은 누구에게나 38선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며, 우리나라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것을 늘 강조해 왔다. 정일권 장군도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38선 이북까지 진격하여 공산당을 몰아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워커 장군은 좀 달랐다. 우리 국군을 찬양하는 성명도 발표했지만, 38선은 연합국의 결정에 의한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단 한 발짝도 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미 정 장군에게 한국군의 북진명령을 내린 후였다. 국군은 자기 나라 영토에서 자기 국가원수의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음은 물론이다.
하루 만에 거행된 맥아더 장군 훈장 수여식 그리고 환도식
1950년 9월 29일
오전 8시,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난 비행기가 한 시간 반쯤 비행했을 때 인천 앞바다가 보였다. 전함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대통령은 시종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시의 여러 군데가 파괴된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건물들은 앙상하게 파괴되었고 여기저기 포탄에 맞은 자취가 드러났다.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나는 뒤에 타고 있는 황비서에게 맥아더 장군에게 수여할 훈장을 확인시켰다.
김포 비행장에 도착하니 많은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눈에 익은 몇몇 특파원과 기자들이 대통령의 서울 복귀를 취재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 곁에는 워커 장군, 아몬드 장군, 조이 장군 등이 서 있었다. 대통령은 비행기트랩에서 내려 맥아더 장군과 악수를 나누며 감격적으로 껴안았다. 그 순간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어 대통령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동양인을 제대로 이해하여 존경하는 겸허하고 솔직한 인품의 소유자이다. 대통령은 그를 무척 좋아했다. 공적으로 자기 나라의 이익에 관계되는 일에서는 둘 모두 강한 성격을 드러내고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었지만 사적으로는 언제나 격의 없이 심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며 서로를 위하고 아껴주었다.
뽀얗게 이는 먼지 길을 뚫고 달리자 멀리 한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 얼마나 한 맺힌 눈물을 흘려보낸 강이었는가. 강물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고, 한강을 바라보는 대통령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리는 폭격으로 모두 부서져있었다. 차는 한강을 건너 강둑을 올라가서 마포를 지나 서대문 쪽으로 달렸다. 서울 시가는 무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도로변에는 영양실조로 수척해진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부르고 손을 흔들어 환영해 주었다. 대통령도 나도 감격하여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시가지로 들어설수록 공산군들의 살육과 방화와 파괴의 흔적이 더 심하게 드러났다. 중앙청 역시 검게 그을고 유리창은 모두 박살이 났으며, 아직도 매연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멀리서는 여전히 포성과 총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중앙청 현관을 지나 중앙홀로 들어갔다. 아직도 연기 냄새가 사방에서 났다. 구리로 된 둥근 돔은 찌그러져 있었고, 가끔 천장에서는 작은 유리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식이 거행되는 동안에도 계속 달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유리파편이 떨어져내려 신경이 곤두섰다. 기적적으로 다친 사람은 없었다.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맥아더 장군은 수도 서울의 기능과 권한을 한국정부에 돌려준다는 요지의 연설을 감격어린 어조로 말했다. 대통령도 이에 감동하여 연합군의 노고에 감사하고 전사한 유가족에 위로를 보내며, 승리자로서 적에 관용을 보이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비범한 군복무의 기나긴 생애를 통하여 장군이 이룩한 모든 업적 가운데 가장 훌륭한 업적으로서 역사는 국제연합군을 이끌어온 장군의 통솔력을 기록에 남길 것으로 본인은 확신합니다”라고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찬양했다.
악대도 의장대도 없었지만 참으로 감격적이고 의미 있는 환도식이었다.
식이 끝난 후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에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지체 없이 북진해야 하오. 그들은 군을 재편성할 시간이 없을 것이고, 저항할 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국제연합이 38선을 넘도록 자기에게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대의사를 표했다. 대통령은 장군에게 “국제연합이 이 문제를 결정할 때 까지 장군은 휘하부대를 데리고 기다려야겠지만, 한국군이 밀고 올라가는 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아니오? 여기는 그들의 나라요. 장군이 우리 군대에 공중지원을 한다면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요. 내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우리 국군은 북진할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오후 2시 대구.
대통령은 다시 대구로 내려가 육군본부에 들러 정일권 참모총장과 참모 장군들(강문봉, 양국진, 황헌친, 최경록, 김형일)에게 38선의 존재 여부를 물었다. 이들도 이미 38선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다고 답변했다. 대통령은 기뻐하면서 정 참모총장에게 국군의 북진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7월 14일 맥아더 장군에게 편의상 넘겨주었던 우리의 작전권은 우리가 필요할 때 언제고 대통령의 권한으로 회수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했다. 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대통령은 정 장군에게 평양은 우리 국군이 먼저 입성할 것과,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지대를 유엔군에 앞서 진격하여 확보할 것을 지시했다.
서울로 올라와 늦은 군용 점심을 들고 난 뒤 우리는 경무대로 향했다. 우리보다 먼저 올라온 경호원과 경무대 직원들이 아직도 정리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이선영 경사가 제일 먼저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남일(南日, 당시 북한 육군사령관)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고급 양복 윗저고리가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양말이 널려 있었다. 너무 황급히 도망치느라 남일은 양복도 버려두고 양말도 제대로 못 신은 채 떠난 모양이었다.
남일과 공산당 고위 관리들이 마시다 남겨둔 채 버리고 간 소련제 양주도 상자 안에 가득 있었다. 나는 이 전리품을 여기저기 승전선물로 보냈다. 무초 대사에게 보드카 2병과 백포도주인 부르뉴 2병을 선사했고, 노블과 워커 장군에게도 몇 병을 보내주었다.
이승만의 평양 연설과 민족주의
1950년 10월 30일
대통령은 오전 7시 반 경무대를 출발하여 8시 35분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평양으로 향했다. 바로 열흘 전까지 평양은 우리의 적인 공산당들의 아성이었기 때문에 나는 대통령의 안위가 몹시 염려되었다. 그러나 태극기를 든 평양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열렬히 환영했다. 연설을 마친 대통령이 군중 속으로 들어가 수많은 시민들과 악수하며 껴안고 등을 두드리는 바람에 수행했던 사람들과 정일권 장군이 무척 애쓰고 혼이 난 모양이었다. 신 국방장관은 물론 항상 느긋한 김광섭 비서도 대통령의 뜻하지 않은 행동에 어찌나 놀랐던지 목숨이 10년 이상 단축되었다고 말했다. 시청 발코니에 올라선 대통령에게 환영식장에 운집한 군중들은 눈물을 흘리며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감격한 대통령은 긴 연설을 했고, 시민들은 뜨겁게 박수를 쳤다. 평양시민 환영대회에서 대통령이 연설했던 내용을 김광섭(金珖燮, 시인) 비서가 적어서 가져왔다.
“우리는 단군의 후손으로 모두 형제요, 한 핏줄이니 다시는 서로 헤어지지 말자. 한 덩어리로 굳게 뭉쳐서 공산당을 몰아내고 기어이 남북통일을 완수하여 삼천리강토에서 영원무궁토록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힘을 합해 살아가자. (...) 우리는 피를 흘리며 싸워서 자유 독립국을 세운 것이니 어떤 나라든 들어와서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는 못할 것이며, 또한 우리가 간섭받을 이유도 없고 받지도 않은 것이다. 남북동포가 오직 한 덩어리가 되어 통일된 민족의 기상과 의지로 내 나라를 만들어 새 생활을 하자. (...) 과거의 잘못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자. 이제는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고 또 뭉쳐서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4천년을 이어 내려온 한 혈족으로서 아무리 어렵고 가난해도 있는 것은 서로 나누어 쓰고 나누어 먹으며 서로 돕고 양보하여 하나로 굳게 뭉치자.”
모든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대통령은 오후 1시 35분 여의도 비행장에 안착했다. 가슴에 넘치는 기쁨과 감격을 감추지 못해 순진한 소년처럼 흥분해 있던 대통령은 경무대 식구들에게 이제 남북동포가 한데 모여 잘 살 수 있는 통일의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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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몽골 만화 전도 (37차)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azirite33&logNo=222825060669&navType=by이번 '땅에쓰신글씨(이하 '땅글')'팀의 프로젝트는, 다시 몽골 초원으로 향했습니다. 올해가 몽골 교회들이 정한 '몽골 전도의 해'인데, 지난 32차, 34차를 통해 배포된 만화 전도책자가 너무 큰 반향을 일으켜 다시 한번 인도가 아닌 몽골 타켓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몽골에는 지금까지 만화 전도책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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