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독교여자 절제회 - KWC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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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절제운동

절제회 | 2018.04.07 16:37 | 조회 9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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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통치기 절제운동

무단통치기간에 일제의 수탈과정이 생긴 주정과 연초의 산업화, 아편재배, 공창확대 등으로 퇴폐문화가 스며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절제운동 대상이 한국인의 악습으로부터 일제의 수탈과정에서 형성된 퇴폐문화와 세속화로 점차 바뀌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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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통치기에 생겨나는 문제에 기독교는 전통적인 개인의 복음적인 회심과 교회의 절제운동관련 법규제정을 체계화시키면서 대처하였다. 그러다 3.1운동 때에는 일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던, 공창과 아편을 문제 삼았다. 선교사들은 한발 더 나아가 공창, 아편, 술집, 청소년흡연 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3.1운동은 이전까지 없었던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운동이다. 3.1 운동의 핵심 주체는 기독교였다. 독립선언서 서명자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그 중에 1920년대 절제운동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YMCA 관련인사는 9명이었다. 그리고 3.1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된 장로교인만 3,804명이었다.(The Commission on Relation with Orient, The Korean Situation , 5.) 당시 총 인구 2천만 명 대비 기독교인이 1.5%이었지만, 피검자 중 기독교인은 17.6%나 되었다. (김승태, “종교인의 3.1운동 참여와 기독교의 역할韓國基督敎史硏究 25, 22-4.) 이런 숫자는 그만큼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교사들은 3.1운동 원인을 1) 독립에 대한 열망, 2) 군부의 횡포, 3) 민족말살정책, 4) 사법부나 행정부에서 한국인 배제, 5)  한국인에 대한 차별, 6)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박탈, 7) 제한된 종교집회, 8) 한국인의 유학과 해외여행 금지,9) 비옥한 토지 약탈, 10) 비도덕적인 것을 끌어들임  11) 만주로의 한국인 강제 이주, 12) 한국인보다는 일본인에게 유익을 끼침 등으로 정리하였다. (The 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미국 기독교연합회)의 The Commission on Relation with Orient(동양관계위원회)가 3.1운동에 대한 조사를 비밀리 작성하여 The Korean Situation ,Ⅱ를 1919년 7월 과 1920년 4월에 각각 발간하였다. The Korean Situation ,자료총서 제 19집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3.1운동은 1907년 부흥운동으로 초월적 신비체험, 내면의 실존, 윤리질서를 수립한 기독교인들의 주도로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장로교의 길선주와 감리교 이필주였다. (김승태, "3.1운동에 대한 신앙운동사적 이해" 초기 한국기독교사 연구, 서울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242-50)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일제의 수탈과정에서 형성된 공창문제와 아편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운동은 문제 제공자 일제에 대한 애국적인 신앙적 항거였다.

-장금현(2004), 한국 기독교 절제운동 연구,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06-108. 발췌-



일제 문화통치기 절제운동

일제 문화통치기에는 기독교가 시대적으로 다양한 것들을 겪어야 했다. 이전보다 심해진 일제에 의한 퇴폐문화 유입, 사회주의의 반기독교운동, WWCTU와 세계적인 초교파연합운동, 여성들의 사회문제에 부응하고, 여러 기독교 청년단체가 세워지는 것을 기독교는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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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간에는 이전과는 다른 기독교 절제운동의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기독교 절제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다양한 방법들 즉, 농촌운동, 강연회, 선전대회, 의학적 연구자료 이용, 정간물과 자료집, 물산장려운동, 저축운동 등이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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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간 동안의 기독교 절제운동은 일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운동, WWCTU와 세계적인 연합운동, 기독교 여성 리더십이 표출된 운동, 기독교 청년단체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운동, 사회주의와 차별되는 복음주의 운동으로 정리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 민족운동을 주도한 사회주의자들은 더욱 반기독교전선을 전개하였다.학생들과 학생 조직을 이용하여 미션계의 동맹휴학, 학생과학운동, 선교사 배척운동 등을 전개하며 기독교를 압박하였다. (강명숙,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들의 사회 경제사상 서울: 백산 자료원 1999, 42-3.) 들의 비판 내용을 정리하면, 첫째로 기독교를 제국주의 앞잡이로 인식하였다. 둘째로 종교를 마취제로 인식한 사회주의는 기독교를 인간해방을 이룰 수 없다면서 종교사멸론을 주장하였다. 셋째로 민중을 현실로 도피하게 만들어 현실변혁의 주체로서의 잠재력을 말살시켰다. 넷째로 사회현실에 대하여 민중의 무관심은 계속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김정권, 1920년대 후반 기독교세력의 반기독교운동 대응과 민족운동의 전개, 한국기독교와 역사 14호 2001, 81.) -장금현(2004), 한국 기독교 절제운동 연구,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39. 발췌-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하여 기독교는 초기에 별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1920년대 중반부터 "죠션민족의게 원슈 공산주의와 샤회쥬의이며"라며 역공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부위렴, "지금은 부흥할때", 기독신보 584호 1927년 2월 16일) "리샹대로 조직된다하여도 그 샤회의 쥬인된 사람의 근본졍신이 개혁되지 안는다면 그 샤회는 다시 젼쟁화할것이다" (000, 00, 평화는 올것인가, 기독신보 695호 1929년 4월 3일)


사회주의자들은 제도만 바꾸면 사회가 개혁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외형적인 제도만 고쳐서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내적인 변화가 우선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기독교의 일차적인 목표라는 것이다.

-장금현(2004), 한국 기독교 절제운동 연구,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24.발췌-



장금현(2004), 한국 기독교 절제운동 연구,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31-2.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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