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독교여자 절제회 - KWC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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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링 선교사 기록 From_Japan_to_Jerusalem_in_Korean

절제회 | 2017.11.27 13:07 | 조회 9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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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침의 땅

 

지난 20년동안 한국 땅의 역사를 기억해보면 조용한 아침의 땅이라는 별명이 애처롭게 들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의 슬픈 역사를 논하기 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에 대한 내 생각들을 나누고 싶다. 아직 이 땅에 온 지 6개월이라는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여기서 만난 사람들을 굉장히 사랑하게 되었다.

이 나라는 산의 기운이 가득하다. 산에서 멀어지고 싶어하지 않고 멀어질 필요도 없다. 높은 산이 많지는 않지만 2000피트도 안되는 다양한 동산들이 나라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한국 땅의 ¾은 이런 동산으로 채워져 있다. 때문에 한국인들은 동산을 사랑하고 또한 애국심이 강하며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집은 보통 일층자리 집이며 초가집이다. 하지만 가끔 몇 채의 집들은 중국 집들처럼 둥근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초가지붕을 바라보고 있으면 굉장히 평화롭고 그림 같다; 편안하고 자연과 가깝게 느껴 지긴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본다면 과연 그럴지는 모르겠다. 거리를 거닐다 보면 느리고 인내심 많은 황소를 자주 보곤 한다. 이 나라의 황소들은 항상 소나무 가지와 짐을 등에 업고 흰색 갓을 쓴 주인이 들고있는 목줄을 따라간다.

새로 이 나라에 오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을 보면 귀신 같아 보일 수 있다. 한국 남자들은  중국 남자들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긴 하얀색 복장을 입고있으며 여자들 또한 하얀 앞치마와 발까지 오는 하얀 드레스를 입는다. 겨울에 눈이 올 때면 하얀 세상에 반짝거리는 하얀 사람들이 이상해 보이곤 한다.

 

반면, 어린 아이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어 무지개를 연상시킨다. 아이마다 다양한 색깔의 옷들을 입고있으며 색깔이 통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나이가 많은 한국 남성들은 상투로 알 수 있고 이는 중국 사람들이 머리를 땋는것과 비슷한 전통인 듯 하다. 상투를 고정하기 위해 한국 남자들은 검정색 머리띠를 이마에 매고 머리를 둘러싼 상투를 목에 묶어 갓으로 고정시킨다 그 모자는 보통 굉장히 가벼운 망사로 만들어져 있고 1 온스보다도 가벼운 것 같다. 상주들은 특별한 밀짚으로 만든 갓을 쓰고 이 갓은 얼굴을 가려준다.

한국인들은 얇고 긴 대나무 파이프를 피는 것을 좋아한다. 남자 아이가 결혼할 준비가 되면 짧은 파이프를 사용하고 작은 흰색 모자를 머리 한쪽에 쓴다. 결혼을 한 후에는 이 흰 갓을 검정색 갓으로 바꾼다.

 

한국의 전통 옷은 굉장히 아름답지만 동쪽과 서쪽, 신세대와 구세대가 교류하는 듯한 묘한 전통 패션을 보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예를 들자면 젊은 남성이 긴 흰색 전통복에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나 구할 수 있을 법한 회색 펠트 모자와 구갑테를 쓰고 있을 때를 말한다. 그를 보면 굉장히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그는 그만큼 당당하고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하다.

 

한국의 거리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지게라는 것을 등에 메고 돌아다니는 남성을 가끔 볼 수 있다. 나무로 만든 가방 같은 이것을 남성은 메고 돌아다니며 지게에는 굉장히 많은 양의 상자나 보따리들이 올려져 있다. 남성은 상체를 구부리며 걷기 때문에 굉장히 무거운 짐도 허리의 힘으로 들 수 있다.

새해가 시작되던 찰나에 나는 서울에 도착했고 사람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어른들의 옷은 하나 같이 하얗고 아이들의 옷은 알록달록해서 사람들이 꽃밭에 있는 꽃 같아 보였다. 아버지들은 자식의 손을 잡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인사 드리러 데려가고 있는 듯 했다. 어머니들은 새해가 시작되면 첫 삼일 동안은 집에서 가족과 친척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한다. 그들은 아침에 굉장히 부지런하고 현명한 여성들처럼 일어나 음식을 차리지만 밤이 되면 술에 취해 바보가 돼 돌아올 때가 많다.

참고로 내가 지금 있는 이 도시는 영어 단어 ‘soul’ (영혼/마음)처럼 발음할 수 있지만 가끔 해외에서 오는 사람들인 ‘sool’ (수울)이라고 잘못 발음한다. 이 때문에 가끔 다른 나라에서 온 선교사가 수울을 찾는다고 할 때 사람들이 술집으로 데려가는 웃긴 일이 종종 발생하곤 한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색상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처음에 굉장히 놀랐다. 하지만 곧 알게 된 것은 한국인들은 하얀 모슬린천으로 만든 옷을 야채 물에 담가서 염색을 한다. 그리고 코팅제를 입혀서 옷을 반짝거리게 만들어 멀리서 볼 때는 옷이 마치 실크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이 계절에 나는 한국인들의 잔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콩나물과 고기가 들어간 만두를 먹고 또 김치라는 음식을 먹었다. 이 음식은 소금에 절인 배추로 만들어졌고 독일의 ‘sauerkraut’ (독일식 김치)랑 비슷하다. 이 음식을 먹을 줄 알아야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을 인정해 주는 것 같다.

김치는 굉장히 자극적인 맛과 냄새를 가지고 있다. 앞에 차려진 음식은 질문하지 말고 먹으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도 잠시동안 잊어버리게 된다. 배추 본연의 맛은 사라진 채 김치에서는 생선, , 고춧가루, 기름, 그리고 마늘 냄새가 강하게 진동한다. 야채들은 가을에 소금에 절여진 채 항아리에 담겨 진다. 거기서 나오는 강렬한 냄새는 표현하기가 어렵다. 한국에 처음 방문한 한 선교사는 자기의 집 옷장에 죽은 생쥐가 있는 것 같다며 목수를 불렀던 적이 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옷장안에는 마을 학교에서 담근 김치가 보관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저녁을 먹기전에 종을 울리지 않는데 이는 김치를 식탁에 놓으면 냄새때문에 사람들이 저절로 식사 시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중국에서 지렁이를 먹었던 적이 있는 것 처럼 나도 김치를 한번은 예의상 먹어본 경험이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잔치는 기독교 잔치였다.  그리하여 술은 없었고 식혜와 감으로 만든 차가 있었다. 식혜는 너무 달아서 먹을 수 없었지만 생강 주스는 굉장히 맛있었다. 이 주스는 감을 말린 후에 물에 담가 생강과 개피를 끓여서 만드는 차다 (생강차).

한국의 수도인 서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예루살렘 도시가 산으로 둘러 쌓여 있듯이 서울이란 도시도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서울 도시는 급격하게 외국 화되고 있는 것 같다. 전기 카트는 물론, 자동차도 몇 대가 보이고 외국 건물들과 선교지들이 보인다.

한국 사람들은 교육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 독립 운동의 여파가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지식을 얻는 것에 관심이 많고 정부 학교의 출석율은 2년상에 45% , 선교 학교의 출석율은 87%.

한국인들은 나라를 섬기기 위해서는 공부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라의 발전속도는 빠르다. 한 일요일 오후에는 기독교 청년회의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에 거의 1000명의 법대생과 의대생들이 모이기도 했다.

여성 절제회 회의는 YMCA 회의가 주최된 일주일 후 일요일날 열렸다. Evangelistic 센터에 모인 우리는 여성들과 하루 종일 양반다리를 하고 땅에 앉아있는데 다리에 쥐가 나는 일은 서양사람들에게만 있는 가보다.

회의를 한 센터의 바닥은 온돌이었고 따듯한 돌을 바닥 아래에 넣어서 굉장히 따듯하다. 방과 벽은 흙과 기름종이로 덮여 있어서 밖이 아무리 추워도 안은 굉장히 따듯하다. 서양의 과학 기술이 발달했다지만 이 방법은 비용면에서 효과적인 것 같다.

청년회의와 여성절제회 회의 때 나의 통역사는 남작 직위를 받은 윤치호이다. 그의 아버지는 지난 정권 때 전쟁 부 장관으로 역임했으며 그의 집안은 한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가족 중 하나다. 진보적인 윤치호는 한국의 보수들이 진보들을 공격하려 할 때 목숨의 위기를 느낀 적도 있다. 그때 그는 상해로 도망을 쳤고 선교 대학에서 공부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Vanderbilt 대학을 졸업했다. 한국에 돌아 왔을 때 그는 나라를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하고 싶어했지만 황제가 계속 반대했다고 한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 했을 때 그는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있게 됐다. 한국의 음모사건 이후 그는 삼 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지만 그의 죄를 증명 할 만한 증인이나 증거는 정확히 없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면회를 간 한 선교사의 말에 의하면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윤치호는 옷이 한 벌 밖에 주어지지 않고 속옷도 입지 못하게 했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은 기적이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다른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살려 두신 게 분명하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이후로 정부에서 일해달라는 많은 요청들을 거절했다. 한국인들이 이 남자가 얼마나 영웅인지를 알아봤다면 그는 한국의 첫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국에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나란히 들어와서 아름답게 교류하고있다. 영국에서 온 선교사도 있고 구세군 센터도 대여섯개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캐나다와 호주 감리교회와 장로 교회에서 선교사들을 많이 파송하고 있다.

통일을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고 있다. 나는 서울에 있을 때면 Union 여성 성경학교에 다닌다. 굉장히 현대화 되어 있는 이 학교는 전기와 난방시설이 있지만 학생들은 공부보다 집안일에 집중해야 한다. 집에 돌아 갔을 때 집안일이 되어있지 않은 대참사는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는 저녁에 학생들이 다림질 하는 것을 구경해야 했다. 한국 여성들은 빨래를 두들겨서 반듯하게 만들고 프라이팬같이 생긴 뜨거운 돌 위에 옷을 놓고 옷을 뻣뻣하게 핀다. 옷을 태울 수도 있겠지만 그녀들은 능숙해서 옷을 태우는 일은 거의 없다.

처음 한국에 선교사들이 들어올 무렵 Henry G. Appenzeller는 서울에 남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었다. 황제는 이 학교에 큰 관심을 가졌고 이 학교의 이름을 배재학당으로 할 것을 제안했다. 몇 백명의 남학생들은 이 학당에 다니며 하나님과 동료들을 섬겼다. 안타깝게도 20년 전에 Appenzeller 선교사는 조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와 함께 있던 한국인 두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배재 학당은 그의 아들이 교장으로 역임하고 있고 학생들을 주님께 데려 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내가 배재 학당에 있는 학생들에게 술과 담배에 대해 몇일 연속으로 강의를 하고 있었던 찰나에 Appenzeller는 학생들에게 학교 서약을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배재 서약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은 25세가 넘기 전까지는 술과 담배를 일절 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25세가 되기 전까지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남학생은 평생 술과 담배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서약이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무리하게 서약에 서명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오히려 전도서 말씀,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라는 말씀을 나누며 그들에게 미리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94명의 남학생들이 서명을 했고 15명의 한국 선생님들 또한 동참했다. 행사가 끝나자 선생 한명은 선교사에게 와서 나를 사용해주세요. 사용 받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제 절제사역을 위해 그가 적극적으로 사용 될 거라 믿는다.

배재 학당 근처에는 여자들을 위한 학교가 있는데 이 학교는 한국에 최초로 여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학교다. 황제는 이 학교에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 학교는 미국 선교사들이 이끌고 있으며 Alice R. Appenzeller 자매가 교장으로 역임하고 있다.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들에게 대학교육을 제공해주는 한국 땅의 희망이다.

나는 이화학당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 중 한명인 한 여학생이랑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말과 생각이 너무 빨라서 내가 그녀를 위해 영어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면 퀵실버’ (빠른 사람을 부르는 별명)라 지어줄 것 같다. 이화학당 학생들과 가정과 나라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이 기회는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후에 나는 조선 기독교 대학 (현재의 연세대학교)에 갔다. 동쪽에 있는 모든 곳 중 가장 아름다운 위치에 있는 대학이라고 한다. 1914년에 개설된 이 대학은 인기가 너무 많아 어떨 때는 지원자수가 학생수의 두배를 넘는다. 이 대학의 시험을 보기위해 많은 이들은 200-300마일을 걸어서 온다. 몇몇 졸업생들은 미국에서 더 공부를 하고 있고 다른 학생들은 선생님이 됐다. 아름다운 건물에서 이들과 대화를 하며 한국이란 작은 나라가 얼마나 빨리 발전하고 있는지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나는 신학교와 남자 성경학교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한국에 얼마나 빨리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지 산 증인들이었다. 신학교의 교장으로 역임하고 있는 Hardie 박사는 한국 땅의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서 굉장하게 사용한 사람이다. 그는 졸업생들이 절제회 일에 반드시 동참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이는 학생들의 삶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게 분명하다.

 

 

III

한국의 옛 수도

 

서울에서 송도까지의 기차 여정은 짧지만 고통스러웠다. 내 반대편에 앉은 한국 가족은 굉장히 특이했다. 아버지는 잡지를 읽으며 담배를 피고 있었다. 그의 아들은 초록색 실크 옷을 입고 아기는 분홍색과 노랑색이 섞인 옷에 리본이 달린 흰색 양말을 신고 있었다. 어머니는 차분한 복장에 금색 장식이 달린 검정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듯 싶었고 얼마 있지 않아 어린 아이는 어머니를 위해 담배를 가지고 왔다. 저 아이들은 저렇게 담배를 피는 부모 밑에서 무엇을 보고 자랄 것인가? 서양도 동양도 이런 문제는 똑같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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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원조 수도

 

그는 교회에서 높은 직위를 갖은 사람 같아 보였다. 최근까지 한국에서는 기독교인이 담배를 피지 않았다. 담배피는 것은 부적절한 행동이라는 시선이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은 담배를 끊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는 느낌이 있으며 이것 또한 조금씩 바뀌는듯 했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이나 영국의 기독교인들 보다 한국인 기독교인들에게서 더 높은 기준을 바라는 것이 적절한걸까?

 

얼마 안되어 송도라는 곳에  도착했다. 송도는 보수적인 도시며 그 곳의 조용한 길거리들에서 한국의 진정한 본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전에 수도였으며 지금은 폐허로 남겨졌지만 넓은 공간과 거대한 돌 기둥이 있던 궁전이 있었다. 지금은 당시의 건축물들이 없고 초석들만이 그때의 흔적을 남겼으며 송도 곳곳에 다른 건물들이 생겨났다.

 

그 중 Southern Methodist Church는 아름답고 강한 성격을 지닌 선교지다. 남성과 여성들 모두 학생을 받으며 최근까지 교육을 받기 힘들던 결혼한 젊은 여성들에게도 기회를 준다.

 

남 학교는 남작 윤지호와 관련이 있다. Vanderbilt university를 졸업한 후 dr. candler와 한국에 학교를 세울 계획으로 돈을 모았다. 송도에서 사역을 시작했을때 그 돈을 가지고 허물어질 듯한 헛간에서 가르쳤다. 그에게는 예배라는 특권이 세상적인 그 어떠한 것이나 직위보다 더 소중했다. 그 작은 시작으로 세워진 학교는 학생들이 2000명 가까이, 그 중 고등학생들이 290명이나 되는 아름다운 학교로 성장했다.

그 학교 시설 중 하나는 좋은 질의 코든을 만드는 섬유 부서다. 중국에서도 유명한 한국 소재는 색감도 예쁘고 오래 사용해도 잘 버틴다. 5년 동안 씻어도 거의 변화가 없는 것을 보여주었다. 일본 코튼으로 미국 기계를 통해 독일 염색제를 사용 일등급 한국 제품을 만드는 것이 대단하다. 섬유 부서에 단시간 근무제로 일하는 50명의 남학생들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이 사역에 도움을 주면서 세계적인 코튼 제품을 갖고 싶으면 american methodist mission에 연락해보길 바란다.

 

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투자하고 싶어하는 젊은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첫 한국 기독교인은 1886년도에 침례를 받았으며 지금은 86,000 입교인들이 있고 주일학교에는 215,000 명이 등록 되어있다.

하지만 한반도에 있는 이천육백명의 인구에게 복음을 전할거라면 아직 더 많은 땅을 밟아야하고 선교사들이 필요하다. 나는 직접 우상 숭배 중의 가장 낮은 사탄 숭배도 목격했다. 우리가 시골길을 지나가는 도중 꽹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 근처에 갔을때 무당이 병과 재난으로 부터 보호 하기 위한 속죄 희생물을 사탄에게 바치고 있었다. 나와 같이 있던 선교사들은 그 장소로 갔다.

그 집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 우리를 향해 왔다. 꽹과리를 들고 나온 무당은 친절하게 말을 걸었고 사탄에게 기도를 하던 여성들은 다 웃는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대리인들을 만났다. 우리에게 더 많은 시간이 있었다면 이 마을 사람들을 어둠에서 밝은 하나님의 빛으로 인도할 수 있었을거라고 느꼈지만 우리에게는 여유가 없었고 하나님에게 송도를 위한 또 다른 계획이 있었다.

우리가 떠나면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무서운 예식을 계속했다. 무당은 귀신들에게 또 한해 동안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기도를 했다. 그런 후 재단에 있던 쌀을 일부 챙겨가며 사탄과 희생물을 나눠가졌다.

 

iv

작은 것들로 가득한 날

 

한국을 처음 방문한 날 산과 계곡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그 풍경은 사진으로 봤을때 얼마나 더 아름다웠던가. 그 여름 하루 하루의 변화들은 변화무쌍했다. 그러나 어느날 마을은 각 뜰마다 곡식이 쌓여진 높은 탑들이 생겼으며 이것은 한 해 동안의 식량이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그런데 어느 날 지진이 발생했던 것이다. 모든 식량과 건물들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한국은 말할 수 없는 비극을 겪었다. 수백명의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들은 경찰이나 불침번 위원회들로 인해 총 에 맞아 죽거나 맞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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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새로운 움직임을 위한 적당한 시기로 판단 되어 외국인 선교사들이 연방평의회에서 협회를 창립했다. 이 협회의 주 목표는 한국인들이 나라의 권리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으며 한국인 여성들에게도 그들의 리더십을 발전시키는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외국인 보조단은 여러 장교들과 인물들이 함께 했으며 그 중 Union Women’s Bible School의 교장 Anna B. Chaffin Southern Methodist Mission의 총무 Cordelia Erwin도 포함했다.

 

사실상 한국인 여성들로 만들어진 모임은 전 국민을 대표하기 어려워서 우리는 각 지역의 공동체를 세우라는 조언을 받았다. 서울에서는 Anna B. Chaffin이 몇몇 한국인 리더들을 초대하여 순조롭게 모임을 가졌다. 같이 모였던 젊은 여성들의 지적 수준은 그 모임에서 영어 통역이 꼭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 중 유능한 한국인 여성이 조직자/ 창시자의 역할로 나라를 여행하기를 임명 받았으며 그녀의 성과는 놀라웠다.

 

한국인들은 집단성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어느 사회나 공동체에서 소속감을 느끼는 것을 선호한다. 또한, 그들은 무언가 새롭고 서양 방식으로 하는 것에 즐거움과 관심을 보인다. 한번은 내가 여성 선교 컨퍼런스를 참석할 차례였는데 그 행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한 한국인 여성이 의자에 앉아 질서를 지키면서 관중의 참여와 함께, 외국인들의 도움이 필요 없이 그들의 상황을 잘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한국에서는, 중국에서와 같이 대학교와 학교에서 절제에 대한 설명을 특별히 강조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 공무원들의 협조가 도움이 되었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하는 일을 정부에서 알아봐 주었고 교육성에서는 학교들과 연결해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여러번 강의를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들을 가졌다. 정부와 높은 공무원들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으며, 지역 경찰들은 또 달랐다.

 

협업을 하면 너무나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유명한 김익두 목사는 내게 너무 좋은 친구며 진리를 돕는 동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의 이름을 모르지만 그는 그의 나라를 위한 아름다운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부르셨다. 김익두 목사가 거친 성질로 미움을 받았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을 당시의 이야기이다. 5일마다 한번씩 장이 서는 날에는 모든 농부들이 김익두 목사가 싸움을 걸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가끔 작은 선물로 나무 옆에 음식을 놔두거나 김익두 목사를 만나지 않게 악마에게 기도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보면 내 자신이 평소보다 더 깊은 이해로나는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게 만든다. 살아계신 성령님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변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김익두 목사는 너무나도 큰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에게 기도를 받기 위해 먼길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그의 재미난 유머로 상대방의 굳은 얼굴에 몇분마다 웃음꽃이 피게 만든다. 그는 영혼의 구원에 대한 진심 어린 마음이 있다. 나는 그를 어떤 여름에 지역 장로회에서 만났으며 그가 가르치는 여러 전도사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특권이었다. 나의 한국에서의 여정 마지막 순간에 김익두 목사를 다시 만났다. 그는 기독교인들 특히 교회 봉사자들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 곳에는 여성들이 한 쪽에, 남성들이 다른 한쪽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너무나도 좁은 공간에서 가득 찬 사람들은 몇날 며칠이 지나도 전혀 열정이 식지 않았고, 김익두 목사는 매일 신자들과 얘기를 나누도록 나를 초대하였다. 오후에는 천막에서 전도하는 모임을 가졌고 2000명 정도의 큰 규모가 자주 모였으며 천막 밖에서 듣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국에서 나의 마지막 일요일 저녁은 잊을 수 없다. 그날 한 형제가 물고기와 떡에 대한 말씀을 나누기로 했으며 그 굶주린 자들에게 복음과 절제에 대한 설교도 나눌 수 있었다. 대부분이 한국인들이었으며 외국인 선교사들과 일본인 공무원들의 도움이 그 해 조선에서의 가장 위대한 사역 중 하나를 만들었다.

 

한국 학생들은 너무나도 큰 위로와 영감을 주었다. 교육에 대한 열정이 있고 그들의 나라를 위해 사용할 강한 의지를 보였다.

 

고등교육기관들도 물론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와 같이 바로 그 전 해에 신학대학교에서 일했던 목회자들은 굉장히 광범위하게 뻗어나가 있었다. 이 젊은이들이 선교와 목회의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 매우 즐겁다. 이 젊은이들보다 더 어린 친구들이 신앙을 위해 용감하고 지적인 싸움을 하는 것을 보는 것도 너무 기쁜 일이다.

 

원산시에서 만난 한 한국 여자 아이만큼 평생 교육을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어두운 밤, 집으로 가는 데 열 네살 정도 된 이 어린 아이가 우리의 손전등을 들어주기로 자원했다. 그러자 선교사님께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새로 온 학생이며 몇개월 동안 입학을 하려고 했으나 등록금을 낼 수가 없어 입학 허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학금을 낼 수 있다는데 대해 보증인이 되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느날 찢어지고 낡은 옷과 신발을 입은 그녀가 교무실로 들어와서 마지막으로 부탁 했다. 학교 뒤에 선교단체에 속한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에 작은 동굴을 파내어 그 곳에 머물면서 낮에 학교를 다닐 수 있을지 물었다. 나뭇가지를 구해 불을 피우고 작은 농작물과 곡식을 찾아 요리를 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좋은 옷을 입고 다닐 200명의 여학생들 사이에서 형편 없는 복장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배울 수 있는 기회만 있다면 동굴에서도 생활할 마음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의 마지막 제안은 교장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누군가가 그녀의 보증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녀를 학교 기숙사로 데려갔다. 그 중 한 선교사님이 기꺼이 자원 하게 되었고 지금 그녀는 오전에 공부 하고 오후에는 비단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있다. 그녀의 여러 행동들을 보면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될 것에 대해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동양에서는 너무나도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많다. 그들의 잠재력만큼 펼쳐 나갈 기회가 적다는 것이 너무나도 비극적이다. 서양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적은 돈이 얼마나 큰 투자와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점이 매우 안타깝다.

 

여러 곳을 여행하는 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너무 즐거운 특권이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삶, 너무나도 큰 잠재력을 가진 삶, 커다란 과정중에 있는 삶. 여러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신기한 관계들이 보이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교묘하게 맞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아름답고 은헤롭다.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선교사님이 있었다. 그녀의 뜨거운 열정과 헌신을 보고 그녀의 간증과 한국으로 인도 받은 것이 궁금해졌다. 그녀의 고백에 의하면 그녀는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뉴욕에서 간호사였다. 어느날 그녀는 8번가를 걸어가면서 길거리에서 찬양하고 전도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녀는 그때 그들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표정에서 묻어난 무언가를 보고 이끌림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은 완전치 못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완전하단 것을 그녀는 한눈에 깨달았다. 그 간호사는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그녀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 한국으로까지 오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뉴욕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선교라는 것은 꼭 먼 곳을 가야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크고 아름다운 계획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갖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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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죽음에서 삶으로

 

Henry Drummond는 죽음을 환경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 말은 과학적이면서도 영적이다. ‘모든 삶은 다양한 환경들과 함께한다. 화가의 삶은 그의 작품과, 음악인의 삶은 그의 음악과환경과 떨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살면서 환경과 교류하고 이런 교류가 바로 삶의 의미다.” Herbert spencer또한 완벽한 교류는 완벽한 삶이라고 말을 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걸인의 삶은 어떻게 우리가 해석할 수 있을까? 환경만 보면 그의 삶은 죽음이다. 아니, 죽음보다 깨어 있는게 고통스러워서 더 심할 수도 있다. 병이 든 가난한 걸인은는 더 이상 소속될 수 있는 집단이 없다. 그는 조금의 힘이 남아있지만 일거리가 없다. 그는 길가에서 돈을 달라고 구걸하다가 굶어 죽어야 한다. 그의 가족 조차 그를 챙기지 않는다. 욥의 울음이 그의 입술에서 나온다, “나의 가족은 나를 버렸고 나의 친구들도 나를 잊었다. 내가 사랑했던 자들은 등을 돌렸다.” 나병이 특히 무서운 이유는 오래동안 혼자 있어야하기 때문인 것 같다.

미국 칼커타 (calcutta)에서 온 무어 (muir)의사는 최근에 이런 말을 했다: “나병이 무서운 이유는 죽을 수도 있어서가 아니다. 나병 환자에게는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나병보다 사망률이 높은 질병들은 많다; 하지만 나병은 일평생 사람에게 고난과 외로움을 선사한다. 나병환자의 상처투성이인 몸을 보면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사람보다 그들은 죽기를 바라고 죽음이 찾아오면 환영한다.

하지만 선교지에서 나병자들은 다시 삶의 활력을 찾곤 한다. 그의 몸은 여전히 아프지만 사람들은 그와 교류를 하고 그를 사람처럼 대해주기 때문이다.

다양한 선교지들이 있고 나병환자들을 위한 선교지들도 점점 생기고 있다. 한국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땅에는 20,000명 정도의 나병환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중 대략 5% 2000명이 부산, 대구, 그리고 광주의 나병환자를 위한 보호 시설에서 지내고 있다. 이런 시설들은 기독교의 바른 예라고 생각한다. 광주 보호 시설의 예를 들어보겠다.

광주 보호시설은 굉장히 행복한 500명의나병환자의 집이다. 그들은 일상생활을 즐기고 더 중요하게 주님안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광주 보호시설은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산으로 둘러싸인 시설로 평화롭고 강인한 분위기를 풍긴다. 나병환자들은 산 아래에서 매일 아침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 산은 그들의 것이고 그들 외에는 그 누구도 거기서 살거나 일하지 않는다. 거기서 그들은 야채를 심고 밭을 갈고 수확한 모든 작물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R.M. 윌슨 의사와 J.K. Unger 목사님은 이 보호시설의 공동 주인이며 시설에서 지내는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의 애정을 받는다. 윌슨 의사는 그들의 주치의이자 친구이다. unger 목사님은 가는 모든 곳을 태양처럼 환하게 비추는 사람이다. 그는 시설에서 재치 있는 농담으로 환자들을 웃게 만들고 그들을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대해준다.

10월달에 우리는 보호시설에 방문을 했는데 어린 남자 아이들이 우리를 즐겁게 맞이해주었다. 그들은 나병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큰 웃음으로 얼굴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시설에서 학교를 다니고 게임을 하면서 굉장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길가에서 구걸하는 나병환자들과 너무 달라서 놀랐다.

이곳은 다른 보호시설들과는 다르게 그냥 일반 마을과 비슷하다. 정리가 잘되어 있고 모든 사람은 존중 받는다. 집들은 2층 벽돌집이고 빛과 공기가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타일 지붕이 있다.

너무나도 놀라운 사실은 이 집을 나병 환자들이 직접 지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집에 있는 모든 벽돌을 직접 쌓아 올렸고 좀 더 건강한 환자들은 산에서 아름다운 돌들을 찾아서 집을 꾸몄다. 그들의 실력은 대단하며 땅을 파서 직접 수영장까지 만들었다!

몇몇 나병환자들은 프라이팬이나 조명, 가정집에서 사용할 법한 다양한 가구들을 만드는 데에 능하다. 쌀을 담을 바구니도 만들고 오리나 닭, 염소를 키우기도 한다. 가축에서 얻은 우유와 달걀로 그들은 직접 요리를 하거나 마을 시장에 가서 팔거나 다른 물품으로 교환해온다. 개개인이 작은 사업을 운영할 수 있는 체계이다.

그중 몇명은 목공일을 하며 돈을 벌기도 하는데 그들이 버는 돈은 하루에 3.5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데 드는 비용이 많지 않으면 이 돈을 잘 모아서 쓰면 되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우리가 시설에 찾아 갔을 때 한 남성을 만났는데 보호시설의 사람들은 그를 감사한 남자라고 불렀다. 그는 나병에 걸렸었지만 완쾌하고 현재 보호시설에 남아 관리자로 있었다. 그날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별로 아파 보이지 않았다. 우물에서 물을 뜨는 한 여성도, 집 밖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모인 남성 네 명도 다 건강한 사람들 같았다.

대풍자유의 효능에 대해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나병자들은 완쾌가 되지 않아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대풍자유를 잘 바르기만 해도 많은 상처들이 아물고 치유된다. Unger의사에 의하면 완쾌되는 환자는 8% 정도이고 60%의 환자는 임시적으로 병이 악화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의학에 이해 많은 발전들이 있었다. 중요한 건 병에 걸린 초기에 빨리 치료를 받는 것이다. 희망을 잃지 않는 것 또한 큰 치유라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대풍자유를 사람들이 섭취하게끔 했지만 너무 머리가 아파서 이제는 피하에 직접 이식하는 식이며 결과는 좋다.

치유 될 확률이 없는 환자들도 있다. 그들은 시력을 잃었을 수도 있고 죽음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들에게 이 보호시설은 최고의 선물이다. 우리가 만난 한 여성은 42년동안 나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손이 없었고 입이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선교지 정원에서 꽃을 몇개 뽑아 가지고 왔었는데 그녀에게 주자 그녀는 아기를 다루듯 꽃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녀는 여전히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나병 환자들은 광주 보호시설에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들은 보호시설을 천국이라고 부른다. 배고프고 춥고 아픈 세월은 지나가고 보호시설에 들어와 천국같은 사람들과 환경에 오게 된 것이다. 그들은 특혜 받은 5%이다. 나머지 95%에게는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한다.

광주에 두번째로 방문했을 때 나는 일요일 예배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고 그 예배에서 설교를 했다. 교인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줄줄이 외우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한국땅에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나병환자들은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돼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치고 슬픈 자를 만나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환자들 중 몇몇  사람은 질병에 걸려 자기들에게 천국의 문이 열린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저주를 축복으로변화시키신 분이라고 말한다.

보호 시설에 오게 되는 사람들은 그리하여 영적으로도 죽음에서 삶을 얻는 사람들이다. 헨리 드러몬드 (henry drummond)는 하나님을 환경의 영이라 부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이 죽지 않은 자라고 그는 말한다.

사도 요한도 죽음에서 삶으로 변한 자들은 자기 주위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태도부터 다르다고 말한다. 광주 보호시설에 거주하고 있는 나병 환자들이 얼마나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지 궁금하다. 윌슨 의사에 의하면 오성구라는 한 어린 나병환자가 있다. 그의 마을 사람들은 병이 옮을까 봐 그의 부모님께 그를 버리거나 가족이 다 마을을 떠나야한다고 말했다. 그로 인해 오성구의 아버지는 오성구를 높은 절벽에서 바다로 밀쳐버렸다. 기적처럼 오성구는 죽지 않았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 칼을 들고있는 어머니를 보고 집을 떠나게 됐다.

자비롭게도 그는 광주로 가게 됐다. 삼 년 동안 대풍자유로 치유 받은 그는 완쾌되게 됐다. 그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그의 가족과 이웃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도록 다시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파했다. 그 결과 그의 마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남성이 18명이나 생겼고 그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다.

일본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광주에 있는 나병 환자들이 후원 하기를 바랬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일본인과 한국인은 사이가 좋지 않으며 후자는 전자에게 두려움을 느꼈던 과거를 안고 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된 이 나병 환자들에게는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들은 하루에 3-4센트를 벌고 있었기 때문에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결국에는 22엔화로 총 $11을 모으는 작은 기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게 큰돈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 환자들의 환경을 생각하면 엄청난 일이다.

마을 근처에는 흙으로 만든 집들이 몇 채 있다. 겨울이 되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던 걸인들과 나병 환자들이 이 집들에 와서 묵게 된다. 선교사들이 이 사람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이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 길가에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번 겨울에는 들어갈 곳이 부족해 집들 밖에서 울고 있는 걸인들이 백여명이 모이게 됐다.

그때 보호시설 안에서 안전하게 겨울을 보내고 있던 나병 환자 500명은 도와줘야 할 필요를 느꼈다. 다섯명이 모여서 한 명의 환자에게 밥을 준다면 500명이 밖에 있는 100명 모두에게 밥을 줄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난한 그들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위에 있는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했다.

 

VIII

만주의 자석

 

만주는 16세기부터 중국의 Nurhachu가 주변 지역들을 결합하면서 주위 나라들에게 관심을 받게 됐다. nurhachu의 손자의 시대가 왔을 때 만주 땅에 엄청난 기회가 생겼다. 중국 땅을 도둑들이 휩쓸어서 땅을 이끌 마땅한 황제가 없었던 것이다. 황제는 자살을 했고 도둑들의 두목이 임시적으로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때 중국인들은 만주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만주인들은 훌륭한 군부대가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으로 들어가 도둑들과 전쟁에서 승리를 했다. 하지만 만주 부대의 군사령관은 만주로 돌아가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황제로 세우고 자신을 따르는 모든 남성들은 머리를 길게 땋고 다니라고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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